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지키는 형식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도무지 예수님이라는 형식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왜 그렇게도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배반하고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진노케 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자세히 생각해보고 성경을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지신 의를 늘 버렸던 것이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은 형식을 버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무관하듯 생각했다. 그것은 형식을 버리고 내용만 취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육신만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 그리고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결합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먼저 신앙이 개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의 출발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창세기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사람은 이 육신과 세상에 대한 가치에 대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고, 또 세계적으로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나면 '도무지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는가?'라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세상을 바꾸자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 북한 인권 문제라든가, 중동의 문제와 같은 것, 그리고 사회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들을 기도하고 기독교인들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로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런 외침은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물러가라고 외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빛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그 작은 하나의 불빛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새벽이 오기까지 어두움 안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모르는 것이다. 컴맹이라는 말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세상의 어두움은 제자리를 모르는 어두움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기초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빛인 것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죽임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보여준 정도전의 태도였다.


정도전이 꿈꾸던 세상이 절친인 정몽주에게 저지당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정도전은 자기가 꿈꾸는 세상은 자신이 아니면 다음 세대, 그 때도 안 되면 그 다음 세대에서 꼭 이루어질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반면에 훗날의 태종인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그 시대에 자기 손으로 새 세상을 만들겠노라며 정몽주를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하여 정도전마저 죽인다. 여기서 주가 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가를 따진다면 그것은 정도전이다.


이방원은 자신의 손이 아니면 새로운 세상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새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도 믿음도 없었다. 다만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떻게든 이루어질 진리라고 믿었기에 자신이 아니라도 될 것이라 믿었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도전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정도전이 자신이 꿈꾸던 세상은 자신이 아니라도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었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그렇게 믿는 믿음이 온전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는 정도전이 죽음을 맞이하듯 희생이 따를 수 있다. 또한 이 믿음은 믿는다는 그 하나 만으로 말만 하고 있거나 글이나 쓰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도전 역시 자신이 살 동안 최선을 다하여 그 세상을 위하여 힘썼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 대하여는 자신이 아니라도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경영하심을 믿어야 하고, 또한 그러한 믿음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 동안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에 대하여 야고보서와 골로새서와 같은 성경에서 사도들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 사도 역시 그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요한 일서 2장에서 3장으로 전환되는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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