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세상 안에 사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고 그릇이라면, 이 세상 또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그러므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표현된 만물들이 본질이라 생각하거나, 또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신앙에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사건을 가지고 봐도 그렇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나는데 이것은 어떤 동산에서 광야로 쫓겨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나름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정의를 내리는 위치, 곧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정의 내리는 자리로 가려하면 만족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있음에도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선악과의 말씀이기도 하다.


특히나 많은 종교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을 신앙의 대적으로 삼거나, 대충 해도 되는 종살이로 여기거나 또 가족과 같은 사회 구성으로 인한 관계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은 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이 세상과 육신의 삶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의 모습이다.


요한 사도는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정체성과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진 목적을 알게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요한 사도는 구체적으로 재물이 있고 재물이 필요한 형제가 있는데 돕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그렇다고 이 말씀이 노숙자에 밥 퍼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고 내용 없이 형식만 취하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은 형제이다. 형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받고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형식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나 깨나 교회에 있고 성경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속한 일원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는 짜지 않다는 말이 있다. 짠 바닷물 속에 산다고 그 고기가 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산다고 세상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가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삶, 하나님의 뜻과 의를 삶으로 표현하는 삶을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런 사람들이 서로 형제인 것이다. 이 형제를 위하여 세상의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세상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을 표현한다. 젊음도 노쇠함도 자신의 의나 뜻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운명의 표현이다. 사람이라는 유전인자의 표현인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2)



개는 들에서도 짖고 집에서 짖는다. 절대로 '야옹'하지 않는다. 개가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의 유전자를 자나 깨나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유전자가 그렇듯 사람의 삶도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목적이 늘 그렇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표현은 당연히 자신의 육신과 세상에 속한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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