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시기에 있어 가장 큰 종교적 문제인 이단에 관한 문제는 요한 사도 뿐 아니라 많은 사도들에게 있어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였다.


지금은 이단이라고 하면 대부분 '내가 예수다.'라는 식의 신앙적 변질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던 시절이라 그런류(?)의 이단은 존재하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적 관점은 아무래도 영지주의였다. 그것은 '내가 예수다.'식의 지금의 이단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에 가깝다. 실제로 본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異見)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철저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인간적인 능력들이 신앙에 의지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있던 시절에는 그것이 더 어려운 문제였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인데 다른 능력을 보여주신 것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육신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는 모습은 동질성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려운 모습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심이 구체화대고 세상적인 관점과 결합하여 그 의심에 대한 변질된 대안들이 생겨났고 그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정체성 중에 사람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과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 정체성이 없으면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를 늘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잠재적으로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다. 만드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보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그것에 열광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의 핵심은 십자가다. 그 이전의 기적들도 다 그 기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십자가 이전에는 기적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기적인 내재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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