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에는 노력이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람 안에 사는 것에 훈련이나 노력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신의 유전 정보가 그렇듯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 또한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생명의 세계라는 것이 명확하게 자기 안에 있다면 수고하듯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신앙생활을 무슨 업적을 쌓듯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종이나 하는 짓이지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존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 자녀가 자신과 닮았고,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보이거나, 또한 살면서 자신과 같은 삶의 방식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또한 그것에서 묘한 기쁨이 있다. 왜냐하면 아들은 그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확인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수고함으로 아들임을 인정받지 않는다. 아들은 사람들이 그 아버지와 닮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사람들이 아버지와 닮은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하여 수고하고 업적을 쌓아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이 하는 신앙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살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는 종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품성이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의 세계 안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 뿐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진리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늘 수고하고, 행여 하나님 앞에 실수할까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사람의 유전자로 사는 것에 노력은 하지 않지만 더 사람답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모순이 있는 논리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산다면 정말로 사람답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졌다는 것은 사람으로, 또한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하여 염려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강박이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 삶'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성공에 두고 집착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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