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장 1-6절) 범죄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7. 16:05 Writer : 김홍덕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형식이 본질인줄 알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히 11장)"고 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먹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선후를 깔끔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는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하는 말에는 사는 목적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창조주가 주신 존재의 목적, 그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이 삶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어떻게 자신 스스로가 그 목적을 설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돛단배 안에서 부채질하면 배가 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의지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내게 삶을 부여한 이가 있고, 당연히 목적도 그 분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면 본질을 알 수 없다.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먹는 것이 사는 것이 되고, 성적 쾌락이 성욕의 본질인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은 당연히 육신의 죄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육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존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는 행동을 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을 보이는 것과 육신과 같은 형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신 이후에 받으신 시험에서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세 번째는 마귀가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보이는 천하만국은 본질이 아니기에 그것을 위하여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근본이시오 삶의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만 경배해야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본질을 망각하고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외면한 근본적인 죄라고 성경은 또한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죄가 죄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삶을 살게 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육신을 제어하고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을 내는 그것이 본질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아무리 열심히 살고, 또한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이것이 없으면 본질이 빠진 삶이 되는 것이다. 마치 겉모양은 너무 좋은 자동차지만 정작 굴러가지 못하는 고장 난 차와 같은 것이다.


차가 고장이 나서 서 있다면 이동을 목적으로 구매한 주인에게 죄를 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아무리 잘 살고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허락한 목적, 그리고 인생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목적을 모르면 근본적인 죄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은 육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육신을 극복해서 위대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육신을 가졌기에 연약하고, 또한 고상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런 사람에게서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화려한 모양이라도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 이것을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범죄다.


이 죄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육신의 삶을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 목적이 회복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 삶에는 실패가 없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개로 사는 것에 실패하겠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그렇듯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육신의 목적을 모르고 살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거듭난 생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사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 그 고백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시작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고,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이 본질을 모르면 다른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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