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일부러 안식일에 집중하셨는지, 아니면 수많은 이적 중에서 안식에 행하신 것이 성경을 기록한 제자들에게 더 각인이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면서부터 소경을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일은 어떻게 보면 약 올리는 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엇인 안식인지에 대한 개념이 없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일은 어떤 형태로든 맘에 안들 것은 분명하다. 모든 가치관이 형식을 바꾸면 의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옛날이야기만도 아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주일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답도 없고, 스스로도 지킬 수 없는 규례는 제쳐두더라도, 하나님 앞에 어떤 수고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그 가치관은 어느 날이 안식일이냐를 떠나서 안식이라는 것이 그 삶에 없는 것이기에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치셨으니 바리새인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을 들으시지 않는데 예수님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소경이 눈을 뜨게 되겠는가?’ 하는 것에 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소경이 눈 뜬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아주 당연한 것인데, 문제는 자신들이 육신의 눈이 보이고, 육신으로 안식일을 지켜낸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착각이다.


영화 빅쇼트의 처음에 나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또 인용하고 싶은데, “난관에 부딪히는 것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그 말이 이 상황에 너무 적합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육신의 신분이 목사나 장로 혹은 세상에서 나름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 모습으로 인하여 자신이 삶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알았다면 예수님도 알 것이라고 하셨다.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그들이 본 모세, 그들이 알고 있는 모세, 그들이 제자가 되려한 모세는 모세의 겉모습이다. 그들은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한다며 바다에 뛰어든 것과 같이 모세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를 가지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규정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목적이 회복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하게 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블로그의 글은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식상하게 여겨지거나, 맨날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하나의 생각이 성경과 세상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라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생각을 깨달았다면 분명 안목과 삶이 바뀌기 시작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그 여자를 모세의 법으로 고소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둘씩 떠났던 것은 자신들의 신앙 근간이 바로 사람이 죄가 있으므로 율법을 지켜서 죄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죄 없다며 돌을 던진다면 자신들이 가진 신앙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없었듯이, 지금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도 그렇게 자기들에게 찔림이 되고 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하는 말의 방향성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니 창세후로 들어 본 일이 없는 일, 곧 나면서부터 소경이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생긴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즉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이 잉태되면 그 생명으로 인하여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과 같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방향은 반대다. 사람이 행동으로 안식일을 지켜내면, 또 모세의 율법을 지켜내면 모세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모세가 그렇게 말하고 전한 이유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왜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전했는지,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지는 모르겠고, 단지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지금도 거의 모든 교회에 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면 결국 듣는 통일된 모범 답안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거의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스스로 죄를 자백하면 죄가 없을 것인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또 성경을 믿는다면 자신이 가진 육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복 주시려고 주신 말씀이 신학(누가 성경을 학문으로 만들었는가? 건방지게.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인데.)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형태로 주셨을 리도 만무하고, 또 사람을 만드신 분이 사람의 능력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해서 타협해야만 하는 말씀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알고자 해야 한다.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 말씀을 주신 의를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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