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고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다들 죽기도 했고, 또 앞으로도 예외 없이 다들 죽을 텐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것이 의문스러워야 하고, 또한 이런 말씀이 자기 안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심에 있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다는 말씀도 하신다.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적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야 당연히 마귀에게서 난 것이지!’라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어떤 사람들을 말한다.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 자기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육신의 혈통으로 조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안에 책의 행간을 읽듯이 알아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그것을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사람들은 전부 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묘한 복선이 있다. 먼저는 예수 믿는 신앙을 성경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라 믿고, 또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또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또 성경말씀은 행간과 같이 뜻하시는 바가 있다고 하면 반박한다. 문제는 그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는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은 또 의미로 받는지, 또 어떤 것은 시대적이 고려를 하는지 그것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다들 자기 맘대로 정하고는 서로 다르니 다투어야 하는 것을 피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큰 주제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것도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몰골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봄으로 생기는 문제는 먼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본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사람이 가진 자기의 기준으로 사람의 외모를 보니 그 모습으로는 자기 기준으로 세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보이는 것에 관한 것, 공로와 소유를 하나님께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좀 장황하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말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죽음을 육신의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순간에는 지키고, 어떤 형편에서는 지키는 그런 것이 아니다. ‘회사일이 바쁘면 주일 지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회사일이 바쁘든 아니면 안식년이든 간에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타협하면서 신앙이라 하고, 이것을 타협하기 위하여 신학의 논조를 들이대고, 이것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과 시대의 상황을 반영해야한다고 타협하는 것은 다 탁락한 것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것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그 말씀을 지키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 아닌 것이 사람 노릇하려고 매 순간 사람처럼 행동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사람 노릇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은 그냥 살면 사람인 것이다. 여기엔 노릇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군 면제를 받기 위하여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논산훈련소에까지 입소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렇게 행동했고, 입소 후 신체검사에서 그것이 통해서 열외 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행동이 아무래도 미심쩍다고 생각한 군의관 한명이 몰래 뒤로 돌아가서 아주 작은 귓속말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열외 상태에서 이제는 귀가 안 들리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싶어 마음을 놓고 있던 그는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생명. 자기 정체성이 아닌 것을 흉내 내고 노릇하는 것이란 것이 바로 이렇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모든 것은 다 하나로 꿰어진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육신을 가진 정체성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기에 예수님을 보고서 그 모습, 세상의 기준으로 볼 대 보잘 것 없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성경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기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던 것을 종식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므로 그 목적을 벗어났던 죄에서 구원 받음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생명의 세계이고,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것이 바로 산 생명이기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이 육신이 죽었다고 해도 그것을 알았다는 내 자아는 영원히 그것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생이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것에서 그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자는 영생을 얻은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안목이 이 성경을 어떻게 행동으로 지켜낼 것인가 하는 관점을 고수하고 싶다면 그 육신도 죽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가능한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성경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세상적인 방식,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의 지향점으로 삼는 것과 같은 신앙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우기는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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