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었다. 내면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백성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요 8:41)

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도,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뭐 그런 것으로 사람을 죽이려 하나?’싶은 것이겠지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부정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에게 ‘너 북한 사람이지?’라고 묻는 것 이상의 의미일 수 있다. 특히나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 살아가는 모든 것에 있어 종교를 떼어 놓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절에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 종교가 다르면 물건을 팔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의 핵심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온전히 육신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진리라는 것이다. 이는 2,000년 전의 예수님이라는 그 한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삶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리인 것이다. 바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리요,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생명의 유전자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타난 것을 보고 그 생명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생명이 속에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알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의 본체이고, 그 생명의 말씀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분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변함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당연히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자기 고향 즉 자기 생각과 철학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아는 자리로 옮긴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지금, 그 모든 신앙이 다 온전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고치고,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보이신 것은 맞지만, 그 기적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신 본질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도 아닌 것이다.


만약에 그럴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살면서 단 한명이라도 죽은 사람 살린 적이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물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럴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러셨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으면 뭐 하겠는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수의 아들 주제에 조용히 살고 있어도 인정해줄까 말까 한데, 매일 창녀와 세리와 같은 이들과 먹으면서 성전에 와서는 육신의 행실을 경건하게 하고자 삶의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신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의 어디를 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초라한 모습, 그저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이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존재 이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의 눈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생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럴 수 있어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뭣 하러 본 적도 없는 다른 나라의 종교를 지금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열심히 살면서 돈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육신을 가진 삶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비출 때 그렇게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즉 이 육신을 가진 삶이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바다 위를 걷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는 너무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된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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