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

지금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 그것은 ‘다시 이르시되’라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시 이르신다는 것은 앞에서 뭔가를 이야기 하셨다는 것이다. 그 앞에서 이야기 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육신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5)

즉 육신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갈 수 없고, 자기들의 죄, 곧 육신으로 판단하는 그 죄 안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며, 죄 가운데서 죽겠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도 우리의 문제고, 사망도 우리의 문제며, 예수님을 찾는 것도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찾은 사람에게는 죄도 사망도 없는 것이기에, ‘오늘 나는 예수님을 찾은 사람인가?’하는 질문에 “Yes!”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나, 예수님께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라고 하신 것은 아주 의미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 인식하고 의문을 가지는 문제가 바로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찾는 것, 처음부터 찾고 말하여 온 것, 그것은 메시아에 관한 것이고 또한 사람의 영원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하는 그것이다.


이러한 것을 연결하면 의외의 것이 나온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 체 살다가 죽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기 죄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자기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 뿌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를 모르는 것, 그것이 죄(원죄)이기 때문이다. 모르면 벗어나기 때문이다. 아니 벗어났다는 것이 모르는 것이다. 길이 그렇듯.


이런 모든 것이 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의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정체성의 자리, 곧 외모와 같은 형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갈수도 없고, 바리새인들처럼 ‘저가 자결하려는가?’ 같은 소리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 하면 이는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느냐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이고 그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외모와 형식과 물질세계로 나타난 것이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을 그렇게 보는 시각과 인식이 열렸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빛에 관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안목, 그런 세계가 열리면 빛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을 모르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하나님께 또 예수님께 그런 외모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얽힌 삶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신앙을 가진 것이 믿음이라 여기는 이 모든 것은 다 아래에서 난 것, 즉 땅에서 난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아래에서 난 것과는 달리 예수님 자체가 빛이시라고 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으니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아래에서 난 자, 곧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리, 예수님의 정체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가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그곳이 바로 사람의 자리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자리이기에 그 자리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죄고 죽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항상>이라는 부사를 가벼이 보면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항상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상>이라는 부사를 붙일 수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어떤 것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 형식과 나타난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형식에 충실하다. 즉 행위로 하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율법의 조항을 몸으로,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의 세계에서 항상은 절대 고수의 경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외모로 판단해 보자. 예수님이 어디 가신다고 하니 그것을 장소로 아는 가치관으로 항상 기뻐하는 것을 지켜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크로노스적인 시간, 달력의 시간, 시계로 가늠되는 모든 순간에 기뻐해야 비로소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된다. 하지만 하늘 아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다만 ‘그러면 어떻게 성경을 다 지킬 수 있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으니까 쉬쉬할 뿐인 것일 뿐 육신을 가지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단 1초도 예외 없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이것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 교회의 신앙적 한계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이쯤 되면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가 다른데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메시아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항상>하는 것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인 것이 그것이다. 항상 사람이지 않는가? 하나님께 항상 기쁨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외모,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생명 그것만이 항상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고,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그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오는 전등은 산 것이고, 불 들어오지 않는 전등이 죽은 것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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