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문제와 같다. 예수님을 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그렇게 물고 늘어졌다. 천한 동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오겠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출신은 어디까지나 나사렛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끊임없는 말씀은 그리스도(the Christ)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전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도 죽이고 싶을 지경인데, 더욱이 그것이 예수님 스스로 말씀을 하시니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하는 것도 죽을 죄지만, 그것을 스스로 말하고 증거하는 것은 가관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증거하니 그 증거는 효력이 없다.”라는 다툼에 이어서 갑자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가 넘쳐 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난데없기 짝이 없는 말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성경은 어쩌면 이런 것이 궁금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난다는 것은 앞에서 포스팅 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표현되면 자신이 그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 생명과 삶은 자기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이 늘 안에서 넘쳐나며, 그 생명이 자기 것이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는 자신도 날아가는 그 순간 백조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넘쳐 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그 안에서 넘쳐 난다는 것은 생수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정체성을 말씀하심이고, 믿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그 정체성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임을 성령의 능력을 알게 되어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사람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말씀이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생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본성이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 그것이 생명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창조의 목적 안에서 살아 있다고 하실 수 있는 생명에 순종된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이 넘쳐나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증거가 거짓이겠는가? 그것은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어디 가서 사람의 자리와 동물의 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사람의 자리에 앉는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탕에 가고, 자신의 근육을 드러내기를 즐기며, 여자는 그 몸매를 과시하고 아름다움을 늘 표현한다. 스스로 남자이고 여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참되지 않는 세계는 생명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세상의 법정에서 자신의 변론이 아니라 증거나 증인이 있어야 하는 것은 그 세계가 생명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듯,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 생명을 증거하고,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안목이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표현한다. 오히려 생명이 자기 생명을 증거함은 다른 이의 증거가 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조차 되지도 않는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 적어도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다 생명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생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넘쳐나게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될게 아니라면 뭐한다고 예수 믿느라 남들 하는 것 하지 못하며 사는가? 그건 바보일 뿐이다.


이것은 사람이 “내가 예수(a christ)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럴 수 없다면 왜 예수 믿는가? 그게 아니면 그냥 오늘 성경을 덮어야 한다. “내가 예수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내가 가졌다는 의미다. 우리가 먹는 사과 한 알은 the Apple이라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고, 그 중의 하나며, 사과의 DNA를 가졌기에 사과이듯, 예수님 the Christ께서 보이신 그리스도(the Christ)의 생명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생명이 되었다면 당연히 나도 예수(a christ)인 것인데, 이것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면 성경 덮어야 한다. (여기서 the와 a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단이 되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된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근원(어디서 왔는지)과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명이 생명을 표현하는 세계를 자연이라 말하기에 뭔가 당연하고 걸림이 없는 것을 자연스럽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표현하시고 드러내심이 참되지 않다고 하는 것이나, 오늘날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 생명을 모르는 세계, 곧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안목일 뿐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생명이시기에 그 생명을 스스로 증거하심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우리 안에서 넘치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고 느끼기에,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론과 방법으로 그것을 흠집 내려 해도 안 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려 해도 도무지 부인할 방법이 없는 정도는 되어야 예수 믿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수가 속에서 넘쳐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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