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경우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물었다. 이 상황은 성경을 조금만 대했어도 알 수 있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특히나 예수님의 말씀인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는 말씀은 아주 우명하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아주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분명히 여자는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혔는데 왜 여자만 잡혀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간음하는 현장이라면 남자가 있었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간음이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돌에 맞아야 하는 율법 조항에 걸렸다면 남자도 동일한 상황일 것인데, 남자는 어디가고 여자만 혼자 잡혀 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쳐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심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짝이 아닌데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한정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남녀 간의 간음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설명하시는 것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짝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을 간음이라 하듯이, 빈 그릇과 같은 사람도 자기 안에 채워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채우면 하나님 앞에서 간음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계명이다.


이러한 간음은 만물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창조와 존재의 목적이 아닌 것을 수용하면 다 간음인 것이다. 망치로 사과를 깎겠다고 하면 그것은 망치에게 간음이 된다. 부엌칼이 음식 만드는데 사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데 사용되면 그것 역시 간음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삶을 드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육신의 일이 풍요로워지기를 하나님께 바라고 또 그것을 위하여 삶을 소진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 간음하는 것이다. 즉 간음이나 우상 숭배나 그것이 그것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의 짝이 아닌 것을 남편으로 삼듯이 삶의 목적 삼아 살아가지만 정작 자기가 좇고 있는 자기 삶의 남편과 같은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이는 수가성의 여인에게서도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너의 남편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남편이 여럿 있었지만 정작 자기의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지 몰랐듯이, 지금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의 경우에도, 그녀가 간음한 남편이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처절하듯 살아가지만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알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내듯, 견뎌내듯, 버티듯, 죽지 못해서, 살 수 밖에 없어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왜 그렇게 사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 사는 목적이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목적은 사람을 만드신 이에게 있는 것이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생명이 되는 씨를 심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가성 여인의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의 남편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람들의 그런 삶을 창세기의 시작에서 “흑암과 혼돈” 이라고 하셨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왜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그런 사람들은 다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자기 삶의 의미 곧 남편으로 여기면서 산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아무리 고상하고 위대해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생수와 같이 넘치지 않는다면 그가 사모하고 의미를 부여한 모든 것은 다 간음한 남편과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구와 간음하는지 조차 모르는 흑암과 혼돈 가운데 사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에 관해서 모세의 율법으로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고 예수님의 반응을 살핀다. 성경에서 율법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한 것은 율법이 돌에 새겨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율법으로 죽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율법은 돌에 새겨진 문자가 율법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문장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율법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마귀가 금식한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사람이신 예수님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었다. 즉 돌에 새겨진 율법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 아니라, 율법으로 또한 세상 만물로 표현하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의 본질이 되고 또 삶의 의미가 되어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그 의도는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라.”라고 하는 것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먹게 만드는, 즉 율법이 자기의 것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돌로도 표현되고, 세상으로도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사람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늘 “모세를 알았다면 예수님도 알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모세만 알았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던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한답시며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를 알았다면 진정 남편이 있는 삶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신랑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신 것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너의 삶에 진정한 남편이 있는 자,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는 의미이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듣지 않았다. 그들이 이 여자를 송사한 것은 여자의 행위, 눈에 보이는 행동 곧 형식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그 형식에 관해서 자신들도 결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이 그런 자들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하지 않으므로 이를 경건하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일을 경건하게 하고, 고행하고 수도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행위에 관해서 자신들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먼저 사람의 형식이란 깨끗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위에 자신이 있으면 돌로 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돌아 볼 때 자신들의 행위에도 결함이 있다는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돌로 친다면 자신들의 신앙의 근간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깨끗지 않으므로 그 행위를 경건하게 해야 한다는 자들이니 자신들이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하다면 그들이 율법을 지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단순하게 자기들도 행동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양심에 찔려서인지 다들 떠나갔다. 그러고 나니 남은 사람은 여자와 예수님뿐이었다.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없어지고 여자 혼자만 남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람, 그 자체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물었다.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라고.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은 다 떠났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사라졌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사람을 정죄하던 율법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사함 받는 상황이고 자리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모세니라(요 5:45)


여자를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여자를 고소했다.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떠났다. 즉 모세가 떠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 우리 사람을 송사하던 그 율법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법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어야만 예수님만 보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는 변화산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보니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여자를 고소하던 자들이 떠난 때, 모세의 율법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끝났을 때, 즉 사람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나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가 용서되는 법과 상황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모세가 정죄하는 죄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이때껏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람의 육신의 행위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다시 여자에게 가서 행위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가서 모세가 송사할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남편을 찾는 자가 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그 죄를 다시 짓지 말라는 것, 즉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남편이 없는 삶, 간음하는 삶, 삶의 목적과 의미가 없는 흑암과 혼돈의 삶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