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또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지를 물으셨는데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요 7:19-2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또 병든 자를 고치시면서 ‘죄를 사하노라’ 하시고, 성전에서 가르치면서 유대인들이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니,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바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면 우리가 다 지키고 있으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러냐고?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다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면서.


정말로 이런 때는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스스로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확신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의 본체이신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기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없다고 해 놓고서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이 땅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지금은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율법을 다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요즈음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인데, 누가 율법을 지키겠는가?’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구약에 기록되었느냐 아니면 신약에 기록되었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다 복음이다 나누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율법과 복음의 기준은 어떤 것이든 ‘해야 하는 것, 무엇을 바치는 것’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의 말씀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율법이 되는 것이고, 구약의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율법으로 다가간 사람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 율법을 다 지키려고 한다고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의 행위로 내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넘어선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서로 말하지 않을 뿐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켜내는 것은 율법이고,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것은 복음이라는 논리도 우스운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 있지만 지금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노력할 뿐이다.’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지기 유익에 맞게 해석되었을 뿐이다. 종교인들의 이런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형성된 시점이 언제인지, 또 누가 가르친 것인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든, 심지어 설교나, 어떤 사람의 말이나 책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어떤 원하는 결과나 기준을 통과하거나, 하나님이나 혹은 어떤 신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지키려 할 때 율법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율법이나 성경 말씀의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율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보면, 어떤 것이든 사람들에게 같은 결과를 준다. 사람은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도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의 어떠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다. 즉 하나님은 행위나 소유의 드리는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분명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율법으로 시험하시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고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율법이라는 것이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살면서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가 있듯이, 율법이라는 것이 어차피 그 형태로는 사람이 지켜낼 수 없지만, 율법이라는 것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율법을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 지키라고 주신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끝내 율법의 목적을 ‘지키는 것(Do)’에 관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율법인 것이다. 주신 목적이 아니라, 주신 형상과 형태만 중요하기에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어서 형상만 유지하려하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이 다 율법인 것이고, 결국 그 율법이 자신을 심판할 뿐이다.


이렇듯 율법을 그 행위로, 그 말씀의 모양을 행동으로 이루어내려는 사람들은 결국 율법을 범하게 된다. 율법이라는 것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주신 것인데, 그것을 버리고 지키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런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도록 하게 하심인데, 그 목적을 져 버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늘리고 늘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 아들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기도할 때 예수님을 내가 죽였다고 말하곤 한다. 또 오늘날도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미 2,000년도 더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부관참시조차 불가능한데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어떤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한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지금의 서기 몇 년이라 할지라도 오늘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 한다. 목숨도 내어 놓겠다. 바다 끝이라도 가겠다. 험한 산이라도 가겠다. 등등.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금의 자리에서 할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존재의 신으로서 어떤 생명을 가졌는가 하는 것에 있는데, 어떤 존재가 되기도 전에 자꾸 무엇을 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이 생명이라 여기는 것이 자기 생명이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 생명으로 살다보니 바다 끝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 때가면 되고, 험한 산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 때 가면 되고,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생기면 연어처럼 목숨을 걸고서 자기 생명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는 그 나라와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부터 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고서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말씀을 자기 몸의 행동으로 지켜 내려는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버린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 해야 할 어떤 행동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아니다. 그런 사소한 것 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것,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있으면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적으로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삶의 모양과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어떤 것을 생명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삶의 모양과 행동과 의로움이 표현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오신 뜻,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사람의 행동을 근본으로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의도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인 것이다. 못을 박기 위하여 산 망치로 사과를 깎으려고 하는 것은 (목적 안에서) 망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듯, 예수님을 오신 목적대로 보지 않고,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하는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 역시 주님을 오신 목적이란 관점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에 관해서 본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버리고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야구의 타자에게 공을 쳐서 1루로 나가라는 것은 경기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지, 타자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타자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번트를 대기도 하고, 때로는 헛스윙도 하는 것이다. 타격의 목적이 타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듯 율법도 지키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이라 이름 붙은 것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이든 그렇게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군대는 구타 자체가 교육일 때도 있었다. 어떤 훈련병 내무반에 보안과 선임하사와 사병들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보안 교육을 실시하겠다. 알겠나?” 그리고는 갑자기 불을 끄고 보안과 사병들이 훈련병들 구타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때린 후에 다시 불을 켜고 선임하사가 물었다. “지금 혹시 구타당한 사람 있습니까?”라고 묻자, 많은 훈련병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또 불을 끄고는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번 하자,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구타당한 뒤에도 “구타당한 사람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또 손을 들려고 하자 다른 사병들이 만류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보안 교육이기 때문이다. 군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즉 무엇이 본질인지를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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