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명절에 성전에 가셨다는 것은 명절을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모든 명절, 절기, 그리고 율법의 모든 말씀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시면 성전이 완성되고, 명절을 지키러 가시면 명절이 온전케 되며,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야기하시면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심도, 절기를 또 율법과 성전을 사람에게 주심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하심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셨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게 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성전과 율법과 절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신 것이기에 결국 그것 역시 예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전이 동물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일부 짐승들에게는 제물이 되는 곳일 뿐이고, 율법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이니 사람이 아니면 성전도 율법도 절기도 의미가 없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도 결국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다. 사람 밖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먹은 음식이 자기 것이 되듯 자기의 것이 되지는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밖에 있으니까. 반면에 밖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안에 어떤 의미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명절과 절기, 율법과 성전을 보면서 그것이 사람 안에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전과 율법과 절기와 명절을 보고 지키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표현하신 하나님의 성품, 결국은 음식이 사람과 하나가 되듯이 사람 안에서 의미와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과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성전과 율법과 절기와 명절이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모두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생명 가진 존재가 되기를 바라셔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런 모든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 안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로켓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로켓을 지구 밖으로 쏘아 올리는 것이 로켓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가진 그 모든 첨단 과학의 목적은 오직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글을 배우지 않아도 율법을 다 아시는 것이기에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다른 것을 말씀하실 이유가 없다. 현재의 설교자들처럼 성경의 신학적 배경이 이러니저러니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 안에 생각나는 것, 그것만 말씀하시면 성경을 다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람이라면 그 말씀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많은 교회가 있지만 사람들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교회에 회의를 느끼면 떠나고 가나안 교인이 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생명이 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성전의 규격과 율법의 구조를 설명하듯이 설교하는 것 그 둘 뿐이다. 전자는 밭이 자갈과 가시밭인 것이고, 후자는 씨가 없는 말씀을 가진 자가 시험 쳐서 면허를 얻어 배타적 자리를 확보하고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교훈은 지금의 그런 설교와는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행위와 소유의 세계,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 외모에 관한 것이 아님을 깨달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사람의 말과 뜻과 글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함에 있어 글을 예수님께서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구원하셨듯이, 지금도 신학교를 졸업할 이유도, 목사 면허도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심령, 그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교훈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진 듯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시키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았다면 사람처럼 말할 수 없고, 사람과 같은 생리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사람이라는 생명이 시키는 대로, 그 생명의 교훈대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또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생명이 삶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삶은 마치 사람의 유전자가 사람을 이끌 듯, 예수님의 모든 삶은 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스스로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생명이 삶이 된 사람은 아무리 자기 자랑을 해도 그 삶은 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이 열심히 해서 우주를 정복한다고 하면 인류의 위대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 the Man이라는 영광이 점점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굳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달라고 시끄럽게 소리치지 않아도, 또 목숨도 내어 놓겠으니 어디라도 보내 달라고 울부짖지 않아도 된다. 보내긴 또 어딜 보낸단 말인가? 이미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는데, 자기 사는 자리에서 자기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삶으로 사는 것부터 해야지.


사람이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영광은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이어야 한다. 한 나라의 장수가 전쟁에 이긴 영광은 패전국에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면 일이지 그런 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영광이란 화려한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이 있어야, 외국 선교도 있고, 군 선교도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그 사람의 정체성은 외면 한 체 위대한 일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사랑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것은 다 소용 없는 것이라고.


사람은 뭐 다른 것 할 것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만드시고, 그 삶의 자리로 보내신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정체성,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먼저 구하는 그 나라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 하는 모든 것은 다 간첩이 침투한 나라에서 위대하고 착하며 선행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나, 해적들이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우정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렇게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늘 불의하다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그렇게 경건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그렇게 부인한 자기 정체성을 만회하려고 하듯이 세상에서, 또 신앙으로 위대한 일을 하려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교훈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불의하게 여기고 도전하는 것이며,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기 본성과 생명이 되는 일에 자신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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