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잠깐 예정론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 보았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정해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 법을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몫이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선택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 없이 하나님의 의지를 사람에게 강제시킨다면 그것을 적어도 사람이 영광으로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이미 사람은 하나님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말하는 예정론은 예상이나 계획이라기보다는 늘 간증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겪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니 그것이 정말로 예정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을 자기 안에서 생명이 표현되어 나올 때 그것을 인지하고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인식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선택된 자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미래라는 것은 미리 알면 아는 그 때 이미 현재가 되는 것이듯.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보이셨다. 그것은 심판이기도 하고, 택정이기도 하며, 은혜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하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그런 식의 말은 어떤 것이라도 다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전하여 듣고, 또 성경을 통하여 읽고 난 다음에 선택을 해야 한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이 놋뱀을 볼 것인지, 아니면 ‘그거 본다고 낫겠어?’ 하며 보지 않든지.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지 않으면 예수님께 올 자가 없다고 하시니 것이다. 즉 이는 육신의 존재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비약인 것 같지만, 요한복음 6장 전반에 흐르는 맥락이 그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즉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인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피했는데, 그렇게 육신의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는 이들을 피하시는 주님을 제자들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다를 건넌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한 사람들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풍랑을 만났다. 즉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섬기는 안목을 가진 이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풍랑 같은 것이다. 육신의 문제는 끊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세수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믿음은 마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렇게 육신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어떤 문제의 주인으로 보는지는 결국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에서 다시 드러난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떡이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떡이라 또한 피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먹어서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신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을 삼으려는 안목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제자들이 그 말씀이 어렵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주제의 급을 급하게 높여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께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이러자 제자들은 거의 멘붕에 빠졌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육신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안목은 오병이어가 시작되면서부터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시점까지 변하지 않았다. 모든 믿음의 포인트가 바로 육신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조차 육신의 개체를 선택하는 것으로 들은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신의 어떠함으로 보시지 않으시는 만큼 육신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남은 것은 12 제자들뿐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우리의 용맹한 베드로가 나서서 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

이쯤 되면 ‘그래 기특하다.’ 뭐 이런 칭찬이라도 하시면 좋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가룟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라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가룟유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배신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하게 12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이의 마음 안에 가룟유다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기대하는 왕이 아니라고 확신했기에 팔아 버린 것이다. 자신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삼으려 한 그 왕, 곧 육신의 문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가진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왕으로 끝까지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왕은커녕 같이 있다가는 자신도 죽을 지경이다 싶었던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가룟유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얼마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누가 좌우에 앉을 것인지를 다투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은 지금 오병이어를 보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한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신앙 역시 그렇다.


하지만 베드로는 비록 가룟유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잡히실 때 도망을 가긴 했지만 그는 끝내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고자 했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처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자리까지 갔던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모습이 왜 다른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가룟유다는 알고 싶지 않았고.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을 육신의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버려두고 배 타고 떠나버린 자신이나 다를 바 없을 수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이고, 무엇보다 거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구분된다는 것이다. 즉 그래도 예수님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아니 그러면 좋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노라하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적어도 한 번은 이 믿음이 온전한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그마저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책도 없다 사실.) 그때 결국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께서 거룩하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예수님을 육신의 주님으로 보는 것과, 존재의 주님으로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거룩이다. 그런 거룩함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영생이심도 알 수 없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기름 넣고, 세차해 주기 위하여 차를 사지 않듯이, 하나님도 사람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과 즐거움으로 알고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보내신 예수님을 육신의 배부름을 해결할 왕으로 옹립하는 것을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런 마음도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거룩하심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들이 우리의 몸과 삶이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라는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have to를 사용한 것은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형광등은 불이 들어와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배불러서 예수님을 임금 삼는 신앙을 떠나야 한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영생도 아니고, 거룩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