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설명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아주 어려운 말씀이었다. 사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그러면서 성찬식을 하는 것이 의아스럽긴 하지만. 하지만 ‘곤경에 빠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다. 확실하게 믿노라 하면서 늘 어렵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말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영생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먹는 떡의 이야기가 아니라, 떡을 먹어서 사람의 몸의 일부가 되듯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보고 믿는 이의 정체성과 삶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지심을 떡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아주 핵심적인 체계(메커니즘)이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의 것으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자기가 생각할 때 이것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몰랐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다. 그래서 성경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고, 또한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사람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이 사람에게 어렵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성경이 어렵다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기 맘대로 보기 때문인 이유 밖에 없다. 세상 살기 힘든 것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이듯, 성경이 어려운 것 역시 자기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읽고 보기 때문인 것 밖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는(정확히는 걸림이 된) 제자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육에 관한 것으로 보면 걸림이 되고, 그 뜻을 아는 것에 무익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간을 읽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제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시고, 또한 자신을 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믿지 않는 자들이란, 12제자라고 보기 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떠나가 버린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 사람이 유다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떠나게 된 이유가 된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고 하신 것을 인함이다. 이것은 언뜻 구원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예정론이라는 것이 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에 있어 어떤 사람은 될 사람, 어떤 사람은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이라는 개체를 기준으로 정하지는 않으신다. 홍길동은 되고, 일지매는 안 된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홍길동은 어떤 행동을 했으니 되고, 일지매는 무엇을 하지 않았으니 안 된다는 것, 또한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오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 마음을 뉘우치는 사람,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인간의 정체성을 보고서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낸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생인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인도된 사람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닌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의문을 가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면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하시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에 좋은 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남자가 여자를 얻음에 있어 그 힘을 사용해서 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적인 폭력을 행사할 경우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그것을 범죄로 여긴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통하여 자신의 혈통을 이을 자녀를 얻음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결정권이 여자에게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가 아무리 그 혈통을 이을 여자를 원하여도 여자가 원치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순리인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 앞의 여자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여자와 같아서, 자신이 어떤 남자의 아이를 낳을 것인지를 선택함과 같이, 자기 안에 어떤 의를 받아 들여서 그 의가 자기의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사람이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가지셨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런 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기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런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가 어떤 것을 자신의 의로 삼을 것인지에 대하여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보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만들어졌는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좇고, 세상의 돈과 명예가 자기 삶의 목적인 줄로 알고 자리를 떠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지 상태에서 하나님과 돈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사람이 자기 맘대로 그 자리를 이탈하여 죄에 이르렀는데, 그렇게 되느냐? 아니면 자기 자리를 회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고서, ‘아 저 모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나란 존재의 존재 이유구나!’라고 깨달으면 예수님께로 온 자가 되고, 그것을 모르고,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 육신을 먹이시는 예수님으로 인식하면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자는 어떤 개체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사람 앞에 보이시는 그 상황,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볼 수 있게 십자가에 높이 다신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지를 정하시는 사건이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았을 때,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된 자 중에서 놋뱀을 보고서, 그 거울에 비친 뱀 같은 자기 모습을 확인한 사람은 살았듯이, 예수님을 보고 자기 정체성을 깨다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인 것이다. 그 깨닫는 정체성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을 보기 전에 그 정체성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육신의 모양과 개체를 세상의 본질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는 문제를 사람의 개별 개체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 숫자에 집착한다는 것은 세상의 본질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탄로 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그러니까 the Man이라는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존재로 만드셨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a mana이라는 개체들은 그 the Man의 정체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a man은 the Man이 표현된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the Man이라는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셨고, 그 the Man의 하나인 각 사람이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것인지의 문제만 남겨 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께로 보내시는 자들은 the Man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은 자들이지, a man 중에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한 개체로서의 사람이 사람(the Man)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기의 것으로 삼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는 구원 받는 사람의 정체성을 정한 것이지, 개체를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체는 결국 어느 것이든 그 정체성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법만 있으면 사람은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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