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 대하여 많은 신앙인들이 비판적인 소리를 내지만 사실 지금도 그 때 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같은 이들은 적어도 범죄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데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 그것이 어이없고, 또 자기 몸이 영생을 위하여 사람들이 먹어야할 떡이라고 하니 그 또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준다는 말이며, 백번 물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또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황당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왔다는 그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신성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강도는 다르지만 지금으로 치면 ‘무슨 이단 같은 소리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육신과 행동 그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형식을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오해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다. 사실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육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산상수훈에서부터 너무 많이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러시거나 말거나 자기 생각과 기준과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같은 상황이다. 어쩌면 교회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6-57)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소고기를 먹었다면 소고기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가 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 정도의 상식만 있어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색다르고 눈에 띄며 그 말씀을 상고할 텐데 자기가 육신의 일을 본질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매주일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을 드린다. 그 시작이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닌가? 그렇게 입만 떼면 하늘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온 떡이라는 것이, 음식이 소화되어 육신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거의 난센스에 가까운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심과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도 예수님을 인하여 산다는 것, 이것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삶이 되는데, 이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께서 하신 말과 행동만 따라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배가 불러서 예수님을 찾고 임금 삼으려 하는 것이며 예수님 없이 항해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성경,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에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이기에 예수님께서 숨만 쉬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듯,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심이 그러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모든 삶이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지를 늘 의심한다. 아무 것도 안하고 믿는 마음만으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 하는가 의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셨으면 그런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랬으니 나는 안 되지만 그럴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그 믿음이 있으면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예수님을 먹지 않은) 것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본성인 행동이 있고, 의무나 다른 목적이 있는 행동이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하여 교회 청소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전이라는 감사함에 청소하게 되는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천국에 가기 위하여 청소한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게 되고, 본성인 사람은 원래 자기 일처럼 하니 생색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자기 몸과 본성이 되어서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 그런 행동을 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분명한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인데, 그렇게 된 연고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 그것 때문이다. 그것을 본질로 보면 어떤 것이든 자기의 유익이 되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니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유익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유익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적반하장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

이는 분명히 방향성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보려고만 하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의 의가 되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믿음은 방향성을 반대로 해서, 육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믿고서 수도한다면서 심지어 자기 육신을 학대하면서 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향이 하나님에서 시작되어 사람으로 표현되면 너무 쉬운 일인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유전자대로 살고, 돌고래는 돌고래의 유전자에 따라 사는 것이듯,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정체성으로 수용한(믿는) 사람은 그 생명이 본성이 되어 그것대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삶인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삶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것이 되면 그 생명대로 사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 힘든 십자가도 그냥 지신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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