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1-21) 바다를 잔잔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0. 17:1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 해서 예수님께서 혼자서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보여주신 것을 육신의 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왕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산이라는 것이 여러 의미가 있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가 짙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이나 임금으로 영접하고 믿으려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산으로 가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육신의 문제, 즉 소유와 공로의 신이 아닌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아들이요, 그 세계의 왕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에 이어서 16절이 “저물매”라고 시작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시각이 해가 저문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성경을 기록한 요한 사도의 안목에는 그것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육신의 먹거리를 해결하는 신으로 여기면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즉 빛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요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의미고, 사람들도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즉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육신의 먹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으면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그 안목과 삶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이 캄캄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늘 어둡고 불확실하다면서 하소연한다. 사람이 자기 삶을 해가 저문 세상과 같이 어둡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나 해결하는 주님으로 믿는 것도 포함된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인생의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정체성,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니 예수님을 모르면 자기 삶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연 듯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사색이 들면 소주를 마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 정체성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알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딱히 소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어도, 인생이 힘들고 어두운니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러 간다면, 육신에게 일어날 일이 어떠할지 모르는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이 존재의 의미를 예수님을 통해서 알고자 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이냐를 주님께 묻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의 눈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으로 삼고자하나 예수님이 산으로 가신 것은 단순히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이 바다로 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없이 바다로 갔다는 것이다. 어두워진 것이나 예수님이 없이 바다 같은 세상을 사는 것이나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 사도는 보았다는 것이다. 큰 풍랑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은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삶의 풍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풍파는 알고 보면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일을 뜻하는 것이지, 세상이 사람을 괴롭히라고 창조된 것은 아니다. 즉 바다를 건너는 배와 같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바다 같은 세상에 풍랑이 이는 것이지,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풍랑 이는 바다가 아니라 여행 온 바다와 같이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 맘대로 세상이 되지 않고, 그런데 그것을 세상이 험하다고 푸념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배와 같은 자기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주인으로 있으니 세상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고, 그러니 세상을 풍랑 이는 바다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배에 계시지 않다는 것은 결국 자기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빈 그릇과 빈 배와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뜻을 담아야할 그릇,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자기 안에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라는 것임을 요한 사도가 봤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알면 세상이 풍랑이 아니라 순풍이 되는 것이다. 그 뜻이 사람 안에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배에 예수님께서 타시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되려 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 인생이 엮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가 하나님과 같이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만든 것도 아닌 주제에.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로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계시면 세상이 풍랑이 아니라 순풍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만든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니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과 마찰될 것이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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