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는 요한복음 외에도 모든 공관복음에 다 나온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세례요한의 죽음에 이어서 오병이어 사건이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빈들에 모였다고 했다. 들, 곧 광야는 세례요한이 있던 곳이다. 세례요한이 죽고 없는 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측은(불쌍히)하게 여기셨다고 했다.(마 14장)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14:13-21 오병이어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병이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 그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에서 이 오병이어는 세례요한이 죽고 난 후의 일이다. 이 의미는 한 사람의 마음, 심령 안에 있는 신앙의 여정에서 세례 요한의 신앙을 지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자기 의를 표현해내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즉 먹은 것이 삶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먹으라고 하신 것은 식인적인이 표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의 정체성이 너의 정체성이 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떡을 떼어 축사하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축사는 접촉 신앙의 표현이다. 즉 떡과 축사하시는 예수님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사를 지낼 때에 제물의 머리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손을 대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요한사도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결국은 예수님을 먹어야 하는 사건으로 확신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마치 먹은 음식이 몸의 일부가 되듯,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확신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지고 인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이 그러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기적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대단한 것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 그것도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니 적어도 만 명을 먹인다는 것은 봐도 믿기 어려운데 2,000년 전에 그랬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서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따라하시기를 바라신 일이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성경은 넘사벽이 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빈들에 모인 사람, 즉 인간으로서 그 존재의 정체성이 빈들처럼 비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먹고 남음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라는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2는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창세기에서 상세하게 다루도록 한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신 떡은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이고, 보리떡이다. 보리떡에 축사를 하셨으니 예수님과 보리떡이 같다는 것이다. 아이가 가져왔다는 것, 보리로 만든 떡이라는 것은 모두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아이는 말 그대로 아이이고, 보리떡은 그야말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서민의 음식이다. 부자에게 보리떡은 먹기에는 자기 자존심이 상해서 안 먹기는 해도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리떡을 먹는 사람들은 부자가 먹는 것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것이다.


성경에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도 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도하면 중병을 낫게 하는 것과 같이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보리떡은 아니다. 어린 아이의 일은 더더욱 아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은 부자가 보리떡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것을 극복함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이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녀와 세리와 같이 먹고 마실 수 없었다. 세리와 창녀의 모습은 그렇게 자기가 율법으로 감추고자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 벽,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보리떡이고, 그것이 믿는 자가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떡은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 사는 것, 그것이다. 인간으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창조목적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체결하는 것으로 사는 것은 모든 나사가 할 수 있는 보리떡이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보리떡은 민중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모습의 하나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야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오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보리떡, 예수님의 십자가,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청렴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 그 목적대로 사람으로 사는 것 그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떤 이는 가난한 자를 돌보고, 어떤 이는 부자가 될 수 있음에도 청렴하게 살기도 하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야만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핵심과 내용이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 있어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도 의미가 있고, 청렴하게 사는 것도 의미가 있으며, 도덕적인 것도 의미가 있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먹으라고 나누어 주신 생명의 떡,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그 생명의 떡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람의 정체성이니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축사하신 떡을 먹어 떡이 사람의 몸이 되듯,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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