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존재와 행하신 일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 학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자기 삶이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클러치를 살짝 떼면서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된다는 것은 수동기어 차량에 대하여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만 실제로 수동차량을 운전해 본 사람이라면 그게 머리로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님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심이 그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 5:37-38)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 이 속은 머리가 아니다. 사람의 속은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즉 본성이다. 그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본성(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표현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그냥 예수님을 머리로 믿고, 객관적인 입증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다고 하셨다. 그 증거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사랑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말씀도 있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았다면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이는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을 가진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육신을 떠나야 영을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다를 가르고, 바위를 쪼개는 바람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육신이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 상태 자체가 죽은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영이신 하나님을 보고 듣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듣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시고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서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하나가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속에 거한다는 것이 또한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말씀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그렇게 자기 안에 있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삶과 예수님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니 당연히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자기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할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영접치 않는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은 법과 생명이 자기 안에 없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의 모습이 오늘날도 만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믿노라 하지만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분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하고, 또 말씀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아니라, 육신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믿음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보다 못한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행실은 지금의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존재의 이유와 정체성이 되고, 또한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모양을 표현해내는 본성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살 동안에 다른 사람이 당하는 화를 당하지 않고, 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헌금 했더니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그 헌금이 천국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죽고 나서 천국에서 부요하게 산다는 식의 믿음을 가졌다면 그런 모든 믿음은 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의 아들의 기준을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삼는 이들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영광이라는 것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므로,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예수님의 성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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