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모든 것이 함축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다른 표현도 그렇지만) 그런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 살림을 받아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의 권위와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죽은 자 중에서 구원을 받아서 살게 된다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 말씀을 두고서, ‘화장(火葬)한 사람은 어떻게 듣고 살아나는가?’ 같은 기막힌 말을 하기도 한다.(사실 그럴 때는 제법 난감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어서)


그러니까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무덤도 사람의 육신이 죽어서 장사지낸 그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죽음과 무덤은 사람이라는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이듯, 사람 사회에 있는 죽음과 무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라는 무형의 하나님이 의가 표현된 것이다.(이런 모든 것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 무엇이 본질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빙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가 무덤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요 5:28)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늘 신비롭게만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보이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죽은 자가 무덤에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육신이 죽어 땅에 장사 지낸 그 시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000년이 넘었는데 아직 그런 사람이 없고, 또 그것이 미래에 있을 일이라고 한다면, 그 이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생 헛짓거리 한 것이 되니 그 또한 아니다. 이것은 육신은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자, 무덤에 있는 것과 같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죽은 자가 음성을 듣고 부활하는데, 선한 일은 언제 할 것이며, 악한 일은 또 언제 해서 부활할 것이냐 하는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무덤에서 살아난 것이 이미 부활인데, 그 다음에 또 선한 행실, 악한 행실을 하고 다시 또 부활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부활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서 생명을 얻는 이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아들의 생명의 본성에 따라 살 수 밖에 없기에 선한 행실이 되고,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그 생명을 얻지 못한 자들은 그 행실이 남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생명으로, 살았다고 여기는 생명에서 비롯된 삶을 살지 않았다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또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이 자기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순종(듣는)하는 사람은 그 생명이 자신의 것이 되기에 생명의 부활이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육신의 삶(목숨) 외에 또 다른 생명으로 살아가는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귀로 들어도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믿고서 그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과 그 믿음의 본질(정체성)이 다르므로 당연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들은 것이 자신의 삶이 되었을 때 들은 것이 되는 것이다.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밭에 가서 일하라는 말을 귀로 들었다고 해도, 가서 일하지 않는다면 들은 것이 아니듯,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수백 번 읽고 들어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 <행실>이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아무 것도 듣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목소리나, 말씀하신 문장을 듣는다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들어야 비로소 듣는 것이다. 놀고 있는 아들을 본 엄마가 화가 나서 “그래 계속 놀아라!” 하는 말을 듣고서 놀면 되겠는가?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정도의 반어법도 아니고, 무식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복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문장 그대로 지켜내려고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한 행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이고, 사람이 보기에 추하고 연약해 보이는 이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시고 심히 만족하신 그런 존재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들이 육신의 삶이 위대해지고 고상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이 연약한 육신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부활은 하나님 아들의 그 말씀이 자기 삶이 되는 사람의 것이다. 그 삶이 선한 행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듣고 사람이 그것을 지켜내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심판하고 괴롭히면서 각성시키려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다 하나님 앞에 악한 행실이다. 하나님 아들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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