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30-47) 영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15. 13:54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상고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지금도 사람들은 영생을 얻으려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묵상한다. 그러다보니 그게 족쇄가 되어 때로는 교회가 시키는 일에 의미를 모르면서, 또 때론 내키지 않으면서도 하게 된다. 영생과 천국이 삶을 볼모로 삶는 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설교자(지금은 대구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교회의 목사)는 영생을 설명하면서 영원이란 태평양의 동서에 있는 모래를 비둘기 한 마리가 혼자서 다 바꾸어 옮기는 세월이 영원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친 소리다. 영원이라는 개념이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생이라는 것을 달력이 가는 것과 같은 시간의 영원함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이라는 것을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으로 표현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원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다.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가진 본질이 있고, 그것을 형식으로 나타내면 크로노스적인 시간, 달력을 넘기는 시간 개념으로 볼 때 끝나지 않는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 영원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다.


영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태에 관한 것이다. 한 사람이 수영을 배워서 수영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을 죽여서 수영할 수 없게 만들 수는 있어도 수영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수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생명 세계에 충만한 것이다. 오늘 내가 먹는 사과 한 알은 내가 먹어 버리면 없어지지만, 사과라는 세계에서 사과로서의 정체성은 영원한 것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으로 육신이 다 하는 날까지 살아낸 것은 사과 한 알이 먹어 없어진 것과 같이 없어지나 사과로 영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영원한 것이다.


더욱이 사과가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 그 존재의 목적이듯, 사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이 땅에서 살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았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은 육신 안에 있는 인간의 정체성 그 본질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살았기 때문에, 육신의 장막을 벗고 나면 그 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만 남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과 본성이 같기에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 육신으로 살 동안 그 사람의 정체성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이 않았다면 제 아무리 세상에서 나라를 구한 영원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영웅적인 삶은 다 육신의 영역,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면 그것도 함께 벗어 버리는 것이니 아무 것도 남을 게 없으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그 무엇도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그 영원한 정체성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영생의 답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며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께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그 육신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모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정체성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영광이다. 병자를 고치고, 예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광은 십자가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즉 그러한 것은 사람의 본분이 아니며,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하는 영광, 곧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과 이미지는 하늘을 날고, 바다를 헤엄치며, 바다 위를 걷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내시고자 했던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 그 정도는 하나님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연약하게 만드셨다. 오죽했으면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볼 때 너무 형편없어서 ‘이런 꼴로 어떻게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는가?’ 여길 정도로 부족한 존재로 여기겠는가? 하지만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신 뜻이시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형편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영광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법으로 경쟁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세상의 경쟁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임했더니 더 잘하게 되어 판사가 되고, 사장이 되어 사람들이 우러러보니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그것을 신앙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라고 하신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요 17:3)>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는 것이나,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말씀이 속에 있는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 되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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