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0-24) 명절을 지키러 가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9. 11:0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그 육신의 형제들과 나름의 갈등을 겪던 그 때는 유대인의 질기 곧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출애굽 과정에서의 광야의 삶을 기념하기 위한 것인데, 시기적으로 추수하는 시절이라 지금으로 치면 어쩌면 감사절과 비슷하게 절기를 지키는 것 같았다고 할 수도 있다. 초막절은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지키심과, 그 광야의 삶을 지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풍족함을 기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가면 좋겠다는 권유에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가시지 않았다가 몰래 성전에 가셔서는 유대인들과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논쟁을 하신다. 논쟁의 시작은 글도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심에서 시작되어 예수님 교훈의 정통성,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자격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셔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시므로 유대인의 공분이 극에 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성전에 가시지 않았는데, 자신의 말씀을 뒤집고 몰래 성전에 가셔서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본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들의 삶의 의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것을 위하여 오셨는데, 아직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명절이 초막절 즉 감사절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꼭 감사절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또한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움을 주시므로 그 시절을 기념하는 절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절기를 주시고 그것을 기념하게 하심은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초막절 그 열매를 가지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사람들을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것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땅에 씨를 심어 얻는 것이 열매이기에,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싹이 나고)되고, 자라서 그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요 형상이 된 존재는 하나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직 없는 때에 초막절을 지키러 가라는 말에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성전에 가서는 사람들에게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은 것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삶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글도 배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놀라는 교훈을 전하시고는 그 교훈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 것이라고 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6-17)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누리는 것에 이르지 못함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예수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창조주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사화복을 지원하시기 위한 신으로서 그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그 일만 보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시고자 보내신 예수님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초인간적인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쟁쟁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더 알고자 한다. 물론 그들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일 뿐, 하나님의 본뜻과는 거리가 멀다.


글을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놀랄만한 교훈을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글을 배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봐야 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 유대인이나,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려면 목사가 되어야 하고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 같은 부류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전혀 모르는 족속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성경과 신학은 목사나 신학자의 하나님일 수는 있어도 사람의 하나님은 아님을 왜 모르는지 오히려 그것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고, 또 명절이 외식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초막절의 열매, 감사절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 양식이 풍년이 드는 것이 아니다. 즉 풍년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열매를 보면서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열매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이지, 땅의 소산을 하나님이 어디 쓰시려고 그것을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심과 같이,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열매가 되고, 그런 열매가 나오는 때가 바로 예수님의 때이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나 자신이나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데, 그 깨달음의 표상인 예수님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아니라며 명절을 지키러 바로 가시지 않으신 것은 아직 사람들 중에 그런 세계가 열린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기에, 명절이 명절다운 것이 전혀 없으니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도 않았고, 명절도 모양만 있을 뿐 기념할 것이 빠진, 알맹이가 없는 껍질뿐인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명절에 가신 것은 그런 명절, 그런 사람들의 상태, 그런 가치관, 그 빈 껍데기 뿐인 사람들의 삶과 명절과 절기의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명절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명절을 명절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하시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일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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