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또 유대인들과 변론하신 초막적이라는 명절 끝 날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아주 분명한 기준일 수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가?’에 확신을 가지고 답을 할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토를 단다. 자기의 형편,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타협을 한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되어 간다.’는 식이나, 아니면 ‘그러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말은 주로 목사들이 한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 사람들에게 되지도 않는 일을 설교하느냐?’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심령 안에서 생수 곧 자신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 어디 조건이 있는가? 조건은 단 하나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뿐이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듯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서 자신이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인정이라도 빨라야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말씀들은 그렇게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악을 쓰면서 본질을 망각하고 지키려 하면서, 이런 말씀은 거꾸로 왜 의역을 하고 말씀 그대로 보지 않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말씀도 성경 그대로 사람이 뱃속에서 어떤 물을 토하여 내듯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 한다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말씀은 생수, 곧 생명을 살리는 물, 곧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다. 누군가의 말씀을 들으면 생수를 마신 것 같아 지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서 그런 말씀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 밖의 어떤 사람의 말씀이 생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나의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이 살 수 있는 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삶을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도 비슷하나 말씀을 하셨다. 그곳에서는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군지 아는 것,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심령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이 마실 수 있는 것이 나온다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자기 삶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신도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신앙은 분명히 간절한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 간절한 것이 아니다. 간절함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간절한 것이고, 있어야 할 것이 있으면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지 않은 시절에는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기를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간절함으로 구하여야 하나, 그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는데도 아직도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매달리고 있다면, 어쩌면 안타까운 일일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의 분량이 그럴 수 있기에 그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교회에 다녔는데, 한 번도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그것을 바라는 간절함으로만 다녔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 암울하다.


신앙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종점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인 것이다. 구원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구원은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 역시 신앙의 시작이다. 이것이 끝이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수는 생명이 마시는 물이니 당연히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도 없는데 생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냥 공업용수나 있으면 되지.


사람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생수가 넘쳐나는 것이다. 그 넘쳐남의 분량은 믿음의 분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저 울고 자기만 한다고 짐승이라 하는 이가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 역시 같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생명은 언제나 생명이니 것이다. 그 생명이 자라면서 그 자람에 따라 그 생명의 본연의 능력과 삶을 보이듯, 신앙도 그런 것이다.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 그 구원이 바로 신앙적인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 시작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서 생수를 마실 생명이 없거나, 스스로 생명이라 여기긴 하나 밖에서 생수를 듣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스스로 생명이라 여기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도 자신도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생수가 넘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다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아직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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