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빛이 광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창세기의 빛은 광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좀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은 광원이 아니라 안목이고, 가치관이고, 인식이고, 깨달음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뜻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니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온전한 분이 아니다. 미완의 메시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 그것이 어두움이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빛이 세상에 왔으매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

무엇인가를 찾고 구하고 간절해 하는 것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없는 사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하고, 글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어두움과 빛에 관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 조명 없는 세상을 말하는 것 또한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것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어두운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들이 어두운 것은 육신의 눈에 관한 것이나, 또는 조명이 없어진 상황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 즉 자기 존재의 이유와 의미라 할 수 있는 삶의 목적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다. 그 어두움 하나가 세상의 모든 것을 소란스럽게 한다. 서로 모르니, 서로 이것이라 주장하고 외치다 보니 어두운 곳에서 서로 보이지 않아 부딪히고 아파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육신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어두움에 비췬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알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컴맹에게 컴퓨터 박사가 그 사용법을 알려 주어 컴맹이 컴퓨터의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 자기의 믿음이고, 그것이 순종이 된다면 자신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가 빛을 만난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존재 목적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 =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어떤 세상이 열리는 일은 살아가면서 종종 있는 일이다. 그 어떤 세상이 열린다는 것은 그 세상에 대한 인식이 열렸다는 것이다. 즉 그 세계에 대한 어두움이 밝아지기 시작했을 때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군대라는 곳이 있는 것은 남녀노소가 다 알지만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입대를 앞둔 이들은 들은바가 있지만 알지 못하기에 다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입대하는 순간 군에 대한 인식이 열린다. 그것이 빛이다. 그래서 군에 다녀온 사람은 군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빛은 모든 것을 밝게 한다. 이것은 조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도 캄캄할 때가 있고, 눈 뻔히 뜨고 살지만 살길이 막막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겪는 모든 어두움의 근본은 자신이 왜 사는지를 모르는 것,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건을 만든 목적을 모르고 그 물건을 사용하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생이 겪는 모든 문제는 인생의 존재 목적과 연관이 있다. 목적을 알면 삶의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모르면 모든 것은 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란 것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려 하고 있다면 그 신앙은, 아니 그 삶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빛이 없는 것이고, 빛이 없다면 천지창조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세계(천지창조)가 아직 열리지 않은 흑암과 혼돈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인생의 문제를 들고 나가서 울부짖는 것이다. 알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것은 오지기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자기 안에서 더 분명해 지는 것, 그것뿐이다 목적을 분명히 아는 이가 그 목적을 드러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만들어 두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고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기를 사모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의 빛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 만드신 목적이자 뜻과 의를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셨기 때문에 인생의 빛인 인생의 존재 목적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의 존재 목적을 발견하는 모든 사람에게 삶의 근본인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밝아지기에 진정한 빛이신 것이다. 이 법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있고, 그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지만 이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짖고 믿는 모든 사람의 믿음과 외침은 어두움에 있는 아우성뿐인 것이다.


그 ‘어두움의 외침’의 모든 것이 바로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이라는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아는 것이라고는 존재의 행동과 모양뿐이다 보니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어디서(나사렛)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기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알지도 못했고 말씀을 하셔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리새인이 달리 바리새인이 아니라, 육신이 부정하니 이 육신을 경건하게 절제하고 수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육신 나사렛에서 왔음을 아는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전혀 경건하지 않은 동네 출신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고, 그런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인생의 빛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부인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항상, 그리고 진리로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며 믿는 믿음의 내용을 보면 모든 것이 육신이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뿐이다. 육신의 건강과 성공, 자녀의 성공, 그리고 교회 외형의 확장이 성장이라고 판단하고 바라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일의 증거는 육신으로 증명 되어야 한다. 즉 외모, 형식에 관한 것으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안목과 가치관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를 모른다. 세상에서, 즉 형식이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 곧 내용이 바뀐다고 믿는 가치관이 생명이 속에 있어 그것이 밖으로 형식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고, 그것이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생명의 법을 모르니 그것이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으로 표현된 그 생명의 법을 볼 수 없다. 율법을 지켜내면 생명이 될 것이라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믿고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의 의와 뜻이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컴퓨터의 사용법을 모르면 컴맹이듯 하나님의 빛과 법에 대하여 어두운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오늘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두움이기에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 생명이 안에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 즉 사람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사람 안에 두심으로 그 목적과 뜻이 사람의 삶과 의미가 되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셨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깨달음이고,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기에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