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에게 사마리안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상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권할 때에 ‘나의 양식이 있다.’고 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러 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랍비(선생, 요 4:31)였지만 수가성 여인에게는 그리스도였기에 제자들에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냥 처음 본 남자인데 자신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런 것일까? 물론 그렇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단순하게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이 먼저 알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모든 것을 예수님이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의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요 4:39)


이것은 단순히 여자가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예수님께서 아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자가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를 말하였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중심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증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가 물을 긷고 또한 남편을 바꾸어가면서 무엇인가를 채우려한 자신의 모은 것을 예수님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자기가 찾고자 했던 자아 정체성,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분이시고, 자신이 그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 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진정한 자신의 그리스도(메시아, 영웅)이고 또 절대로 배반할 수 없는 구주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도 똑같이 증거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 4:42)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또 죽은 사람을 살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일을 직접 가까이서 보고, 또한 자신들이 그런 경험이 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잡혀갈 때 다 도망갔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은 예수님을 바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육신이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고 새벽에 까지 가서 기도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먼저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삶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지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산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다.


흔히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를 아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물론 모르실리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되시는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삶의 요소들을 예수님이 도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나의 창조주이시기에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내가 너희의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은 안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이 끊임없이 물을 기르러 갔던 것과 같이, 모든 인생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물을 기르듯 수고하는 이라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또 여자가 남편을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채우려 한 것과 같이 모든 인생이 자신의 주인을 돈에서 여자에게로 또 권력이나 돈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사는 이유를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찾고자하고 그렇게 갈급해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인 하나님의 말씀의 본체이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시는 것은 우리가 한 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몸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를 알게 하셨듯이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을 깨달은 사람의 삶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보고서 깨달은 것을 깨닫게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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