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27-42) 예수님의 양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6. 11:13 Writer : 김홍덕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대화하는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갔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여자와 대화하고 계신 것을 보았고, 이에 자신들이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권했더니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께 음식을 드렸는가?’ 궁금해 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식을 알지 못하는 것과 수가성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양식이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에 이견은 전혀 없지만,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라고 하셨다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설명하고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양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양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양식, 주기도문에 나오는 양식과 사람이 먹어야 하는 모든 양식에 관한 말씀의 목적과 본질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먹어야 하는 양식이라는 것,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일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 육신을 가진 삶으로 나게 하시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일에 관한 말씀을 보아야 한다. 즉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양식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내다’라는 의미이고, 양식은 채우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가진 자아 정체성의 공허함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시면, 사람의 양식도 존재의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고,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공로나 소유를 드림으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상급을 정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일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부터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가지신 신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체성은 공로나 소유의 드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사람이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행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너는 누구냐?”> 하는 것, <“너는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 존재냐?”>에 대한 답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시다. 성경에 어떤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말씀하시는 것들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본성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당연히 그 생명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고, 사람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이 없는데 행동만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거짓을 행하는 자,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돈을 모아서 좋은 소와 양을 사서 예배드리게 하려 하심이 아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매일 청소하라고 시키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심이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하고 자꾸 드리려 한다. 좋은 교회를 지어서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것이다. 서울은 누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아도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온 우주와 세상이 하나님의 것인데 새삼스럽게 하나님께 바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좋은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바쳐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노방 전도를 하고, 청소하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수고를 할 이유도 없다. 자기 안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으로 할 값이면 가만히 있음만 못하다.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하나님을 기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 아닌데, 그것을 원하신다며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하면서 설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나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성전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 열심이었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이 와서 제사 지내지 못하게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시기까지 하셨다(말 1:10)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사마라아 여인에게 속에서 넘쳐나는 샘물을 얻으려면 내게 먹을 것을 내어 놓아라 혹은 돈을 내어 놓아라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하나였다. “네게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것 하나다.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그것 하나면 영생의 샘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양식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우리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보이셨듯이, 우리의 모든 삶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단 하나다. 사람을 만드시는 것,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안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그것에서 끝났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 안에 채워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이 사람 보내신 뜻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크게 착각하고 있다. 사람이 몸으로 또한 사람이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신이 규정하고, 세상과 결탁한 교회가 규정한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꾸 뭔가 일을 벌이고 또 뭐라도 자꾸 하나님께 바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는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시니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또 우리 모든 인생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이고, 그 뜻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져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온전한 아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양식이고, 빈 그릇인 우리 모든 인생이 채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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