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은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지켰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니까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무엇이 안식인가?’ 하는 것과 ‘안식일은 어떤 요일이나 날짜인가?’하는 것을 알아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의미적인 해석을 알레고리컬한 해석이라며 경계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안식인 사람이 보내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하면 그것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야 자기 마음이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안식일은 언제인지를 제시해야 마땅하겠지만, 현대의 기독교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 역시 알레고리컬한 해석의 부류인 것이다. 즉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인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설명하시고,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대하여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심으로 병자를 고치셨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일이라고 보았다.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는 것이 본질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곧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몸이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하실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안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육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자리에서 늘 죄인으로 있던 병자에게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심은 진정한 안식이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야 할 온전한 일을 하신 것이다.


안식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 안식이다. 집에 있는 부엌칼은 시간을 정해놓고서 쉬는 것이 아니다. 칼이 쉬는 안식일은 자기가 자를 것을 다 자르고 나서 맞이하는 시간이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에 사람을 만드시고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천지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나오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날을 맞이한 사람이 사는 날은 모두 안식일인 것이다. 그래야 천국에서 영원히 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일하는 것이 없으니,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존재 자체가 안식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안식일은 달력에 표시된 크로노스적인,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보내는 시간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 안에 들어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의 상태, 그것이 바로 안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육신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자리는 너의 자리가 아니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 그 본질로 네 자리를 옮기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안식이기에 안식일에 그런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 창조하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가 되는 그 안식의 자리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것이 바로 창조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경쟁의 세계,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그 세계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나 존재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원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의 일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이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일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또한 하나님과 동등 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과 안식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달력에 표시된 날 교회에 가는 것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을, 주일을 지키러 가서는 그렇게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심지어 심판도 한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회복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의 사람이 보내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이 언제냐며 교파가 갈라질 일도 아니고, 주일날 11시 예배에 가지 않으면 주일 성수가 아니라고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 그것을 아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런 안식에 들도록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러 오셨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것이 안식이고 하나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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