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6-26) 진정한 예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0. 08:49 Writer : 김홍덕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 듯 한다. 남편이 없다던 여자는 자신에게 남편이 있었고, 또 있음에도 남편이 없다고 한 자신이 옳다고 하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인정하고서는 다시 난데없이 재화의 주제를 예배로 옮겨가고 있다. 더욱이 예수님도 그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고, 나중에 보면 그것이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물 이야기를 하다, 그것이 남편 이야기가 되고, 그리고는 예배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여자는 묻는다. 자신이 남편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는 것, 언제나 목마르다는 것을 아는 분은 선지자라고 믿었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든데,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맞느냐?)’라고 묻는다. 이것은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이다. 여자가 남편과 하나가 되듯, 인생이 무엇에게 자신을 드려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어디서 예배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예배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이는 마치 처음에 물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당신은 물을 기를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은데 무슨 재주로 물을 마시려 하느냐?’고 묻던 것과 맥락이 같다. 물론 주제는 아주 깊어지고 본질에 다가 갔지만, 아직은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제대로 된 남편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본질에 가까워진 여인에게 예수님은 예배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바울 사도가 다시 이렇게 풀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 어떻게 드리느냐? 어떤 방법과 절차와 예식으로 드릴 것이냐? 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언제나 목마르고, 아무리 바꾸어도 성에 차지 않는 남편 같은 것이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예배드리는 방법을 학문으로 연구해서(이런 코미디가 없지만 그것을 돈 주고 공부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절마다 바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꾸 남편을 바꾸는 것이 그것이다.


예배는 드리는 장소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산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너희>가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제물이 되는 그런 단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되라고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 되는 것, 사람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가 되고, 사람의 삶은 그것을 표현하는 삶이 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제사고 그것이 진정한 예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까 예배 순서를 연구하고, 예배의 의식을 위하여 꽃꽂이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헌금 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의 정신없는 소리들을 하고 심지어 그런 일로 다투고 싸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모두 남편과 살지만 남편 없는 이방인 보다 못한 사마리아 여인의 원래의 삶과 같은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예배도 신앙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 곧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대명사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예수님께 이 <우리>를 유대인이라고 하신 것,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은 육신으로 유대인이 아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민족, 곧 하나님을 모르는 앗수르인들의 피(생명)가 섞여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음을 인용하신 것인데, 이는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심령에 사람이 하나님이 뜻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자기 혈통과 생명으로 삼은 이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유대인에서 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영이란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어 그것이 생명이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는 사람에게 속한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있는 것, 그것이 그 존재의 진리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지, 예배시간에 음향을 거룩하게 하고, 설교자가 쉰 목소리 같은 쥐어짜는 소리로 말하며, 잘 연습되고 자격과 신분처럼 여겨지는 가운을 입고 찬양하는 성가대가 있어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도무지 그런 모습의 어디가 영과 진리에 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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