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는 그 지역을 점령했던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남자도 아니고 여자와 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물은 사람이 마시는 액체로서의 물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다. 즉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육신의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물을 마시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의 어떠함에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그 존재의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은 쇠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육신으로 하는 것은 쇠하여지고, 생명으로 하는 것은 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육신이 사마리아인이든, 육신으로 여자든,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신앙관이 쇠하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토요일에는 목사님이 주일날 설교를 준비해야 하니 목사님을 바쁘시게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급기야 결혼식 주례 같은 것도 삼가자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토요일에 설교 준비를 정성들여 하지 않으면 설교를 잘 못하는 목사라면 적어도 그 속에서 말씀이 샘처럼 흘러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어떤 샘이 물을 내기 위하여 준비하겠는가? 그냥 나오는 것이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나오는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샘물과 같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준비해야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어딘가 허술한 것이다. 물론 전하는 본문을 보고서 준비하는 준비야 있어야겠지만, 그 준비가 바로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어야지, 인용할 책을 보고 예화 연구를 도입하는 것과 같은 것은 강의지 설교는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영생의 샘물이 속에서 넘쳐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개는 때리면 ‘깨갱’하고, 말하고픈 것이 있으면 ‘멍멍’하고 짖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같다. 언제나 개의 본성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니까 그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신문을 주면 신문으로 하나님의 뜻을 풀어내고, 소설을 주면 소설로 풀어낼 것이고, TV로 뉴스를 보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는 세상이니, 자기 안에 하나님 생명이 본성으로 있다면 그게 안 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되고, 속에서 영생의 샘물이 영원히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요 4:10) 이러한 말씀은 요한복음에 자주 나오는데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도마에게 ‘나를 알았더라면?’이라고 하시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미는 예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안다면 그것이 바로 영생이고, 그것이 속에서 영생의 샘물이 영원히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는가? 예수님은 어지간하면 다 안다. 하지만 예수님 정체성의 본질을 아느냐는 다른 문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장)’고 묻기도 하셨고,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는 예수님에 대하여 베드로는 ‘저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 이 땅에 오신 목적, 그것을 바로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면, 많은 경우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대하여 간구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본질과는 괴리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식들이 시험에 붙고, 부자가 되는 것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교회는 목사들이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방해 받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안다면 그 안에서 생수가 흘러넘칠 것인데 뭔 준비를 그리스도인들을 배제한 체 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예수님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주로 설교를 하려 하니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하다 보니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사람은 어쩌면 십자가 밑의 백부장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아기 예수를 알아본 시몬과 같은 사람도 있고, 세례 요한도 있지만, 십자가에 달린 초라한 모습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상에서 시험에 붙고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을 예수님의 일로 아는 사람이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상상이 되겠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의 믿음이고, 그런 믿음은 생수가 흘러넘치기는커녕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가리지 않고 마셔대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생수의 강이 속에서 넘쳐 난다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삶의 본성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성은 어느 곳에서나 그 생명을 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의 생수가 속에서 샘물과 같이 넘쳐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