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2-30) 그는 흥하여 하겠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9. 16:34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강 건너편에서 세례를 베푸시니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걱정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고했을 때에 세례 요한은 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세례 요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할 이들이 바로 지금 세례 요한을 걱정하는 제자들이고 말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세례 요한도 사람인데 그런 상황이 섭섭하지 않았겠는가 싶기도 한데 세례 요한은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체념적이라는 것은 자신도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함이고, 운명적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부터 인정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생명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단순히 한 사람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대명사인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명사다.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으로 삶으로 표현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듯 세례 요한은 육신으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의 대표고 대명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a christ)이라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요 표준이요 대명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을 the Christ로 표현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지켜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과 의지와 육신의 힘으로 지켜내려는 율법적인 모든 신앙인들의 대표가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세례 요한은 <the 율법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신앙이 율법적인 신앙이 쇠하여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의 생명과 삶 안에서 흥하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은 자신이라는 한 사람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제자들이 증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인생에 세례 요한을 따르던 율법적인 신앙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삶으로 바뀌어서 그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이 성경을 읽는 연대나 시대에 무관하게, 자신의 신앙이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신앙은 점점 쇠하여지고 반대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 그 생명의 본성이 행함과 삶으로 나타나는 삶이 흥하여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뭐한다고 우리가 이 시대에 2,000년 전에 두 사람이 누가 세례를 더 주느냐 하는 것과 관련한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지혜 있는 사람은 ‘이게 아닐 텐데?’하는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분명히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신앙은 쇠하여져야 한다고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정말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사고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면서도 교회에 가면 잊을 만하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또 노력하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그 정도가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맞는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면 이런 괴리가 있는 것을 하라고 시키신 것은 심술인가 오류인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야 사람을 또 만들면 되지만, 나는 한번 뿐인 인생을 살고 있는 일회용 삶을 살고 있는데, 지키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데 당연히 염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행동을 지켜내는 것은 결국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 즉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정이 되어야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그렇게 행동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행동의 상징인 손과 발이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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