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자세히 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려고 아들을 보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심판에 관해서도 ‘세상을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구원 역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아직도 세상은 혼돈스럽고 전쟁의 소식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소식들이 일상인데 예수님이 오신 것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가장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면, “정말 그대로 됐나?” 싶은 것이 현실적인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사람들이 세상을 평화롭게 여기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사람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작아 보이지만 또한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온 우주를 그 마음에 담고도 남음이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 마음에 담고도 남음이 있으며, 태초 이래의 모든 역사를 그 안에 담음에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사람이기도 하다.


성룡이라는 배우와 배우 윌스미스의 아들이 나오는 <베스트키드>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흑인인 아이가 중국에서 무술을 배우는 영화인데, 성룡에게 무술을 배우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산에 가는 중에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기고 싶다.”고 그러자 스승인 성룡이 이렇게 답한다. “너 자신만 이기면 된다.”라고.


사람이란 정말로 그런 존재다. 자기 마음과 안목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구원 받은 세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사람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세상이 온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얻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니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리를 회복한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에게 구원은 자신을 구박하는 오리들을 물리치거나 그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닫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은 사람을 만드신 이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정하신 자신의 정체성을 떠난 자리인 죄에서 자신을 지은 이가 정한 자기 정체성의 자리로 회복된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되는 밝음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온 우주와 세상은 구원을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구하러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창조와도 같은 말씀이다. 한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경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세상이 운영되는 모든 것에 자신을 순종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 정체성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이셨기에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아들, 곧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존재하는 것의 존재 목적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달성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 받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기에 모든 피조물 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 아래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바꾸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안목과 인식과 의가 바뀜으로 사람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로 움직이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세상을 창조하신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된다는 것이 또한 빛이 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의 심판이 되는 기준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 곧 구원 받은 이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서 구원하시려 하심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구원,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 밝히 보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고쳐야겠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베스트키드의 대사처럼 자신만 온전한 구원 안에 있으면 세상은 정말로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전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세상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볼 때 시끄러운 것이고, 또 세상이 시끄러운 다른 이유는 그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리들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절대로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시끄럽지 않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하신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심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사람이 나오는 것, 그것에 천지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식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정체성이 회복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사는 모양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 먼저 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듯이 그 사람의 삶을 볼 때 자신도 그렇게 회복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구원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보여준 삶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깨달은 사람의 삶의 수고가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심은 실로 이렇게 놀라운 비밀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복된 소식인 것이다. 그래서 또한 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온전히 알 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산 사람만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원래 소속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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