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6-21) 심판에 대한 오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0. 11:05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은 아주 능동적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주도적으로 영향을 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잘했다 잘못했다고 분명하게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맥락에서 심판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말이 그렇다. 종교 안에서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능동적이라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보는 심판은 사람을 위협하듯 한다. 물론 어떤 심판이든 간에 심판이나 재판은 위협적인 결과를 동반한다. 하지만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벌을 받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인식은 <심판의 결과 = 벌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회의 법이 주는 이미지가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라는 종교 역시 사회적인 법률이 주는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능동적인 것이고, 심판 받는다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이 여기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심판이 되시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결과를 목적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심판이라는 것의 모양새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본 사람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 있다.(아마 마르크스가 이것을 보긴 본 모양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 봐서 그렇지.)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지옥에 간다.’, ‘그러면 큰 벌 받는다.’, ‘그러면 큰 손해를 볼 것이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정말로 심판에 대한 견해가 잘못된 것이다. 심판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그것을 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를 비교해서 자신의 것이 하나님의 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 것에 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고, 그것이 회개고 돌이킴이며, 그런 돌이킴을 계기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삼아 살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심판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지위나 신앙이 좋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신앙이 없다느니, 그러면 지옥에 간다느니 이렇다 저렇다 말로 사람을 심판하고 있기도 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심판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거니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비밀과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심판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도 교훈도 훈계도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무식하고 무례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훈계와 교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높이 달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이나 신앙이 잘못되어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인 것이다.


그런 삶은 아주 힘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도록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억지로 하려 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이라서 그렇게 하려 한다면 너무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사는데 수고가 필요하고 힘들기는 해도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정말로 힘들고 고되고 위험한 일이지만 연어가 아닌 다른 고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지만 연어에게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기 본성이고 유전자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지는 것이고, 생명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비밀을 모르면 입으로 신앙을 논하고 다른 사람의 어떠함을 논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것을 이야기하고 사랑으로 책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무례하고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고전 13장)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아는 것은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의를 돌이킨 것이 심판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심판하고 돌이키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지는 수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사는 수고는 마다하고 입에 성경말씀을 무쳐서 사람을 심판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모습을 비쳐주는 놋뱀과 같은 거울이기도 하고,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스스로 심판하도록 수고하신 상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아는 것은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아는 것이다.


반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인용해서, 또한 교리를 이용해서 교회 안에 사람의 어떠함을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수고로운 삶을 살아서 다른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심판하고 지적질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틀려먹었다고 떠들고 실력행사를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심판도 모르는 자들의 일이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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