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른 성경 구절은 몰라도 이 구절 정도는 어지간하면 암송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말씀이다. 아마 초등학생들조차도. 그만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는 것은 오히려 우문에 가깝다. 너무 많은 정의가 있기 때문이고, 또한 객관적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하나의 정의를 선택하라면 그것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세상이 의미가 있어졌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영광과 성품을 나타내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세상을 사랑했다.”라는 표현들이 있는데, 그것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다르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한 부분도 있는데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세상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세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을 두고 이르심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은 주권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미를 두심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세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게 의미를 주신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주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고, 세상이나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인데, 사람이 세상에 의미를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이다. 그것을 잘 표현한 이들이 바로 롯의 두 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어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데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존재함과 그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다.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고, 아들이 보여주는 모든 성품과 육신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품 안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곧 피조물들의 소망과 그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에 수렴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의미를 주신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래서 독생자다. 독생자는 예수님의 유일성을 상징하는 것에 한정된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유일성은 시작이라는 유일성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말구유에서 나서 자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의 유일성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없다는 그 유일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아버지를 표현하는 한 사람인 아들이 나오는 것에 수렴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를 주신 것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피조물의 존재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으로 알게 되는(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세상을 향하여 또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유일한(독생한)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존재 목적을 주시는 사랑하심을 알고 그 모든 것이 사람인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것과 모든 말씀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기를 바라셔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질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시험이나 결혼이나 재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 기대대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것을 행하시고, 자신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셔도 다 수용한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나, 하나님은 나를 절망 중에 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신의 기대나 신념이지 믿음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온전히 사용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신으로도 아들은 아버지의 어떤 성품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그냥 아버지의 모든 유전자, 그것이 설령 유전적인 질병이라도 그냥 다 수용해내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과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필요해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사람의 생각에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유일한 존재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 유일한 것,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드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영생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