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6-21) 심판과 구원(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8. 08:5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러니까 법원에서 재판을 받듯이 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듯 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심인지를 보이심으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스스로 자신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심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 구원이 되지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자신이 가진 의로 예수님을 심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으면 그의 행실을 재판하듯이 심판하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고, 예수님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보이심으로 심판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한도견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양품과 불량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샘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양품이고 무엇이 불량인가 할 때 그 한도견본과 비교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와 같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구원을 얻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심판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 무엇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모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 모습이다. 세상이 옳다하고 이긴 것이라고 하는 기준으로 볼 때 악하고 실패한 모습,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뱀은 죄악의 상징이다. 뱀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높이 든 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놋(당시 놋은 거울의 재료)으로 만든 뱀은 바로 거울과 같아서 그것을 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뱀 곧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된 이들이며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세상의 기준과 율법으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광야에서 놋뱀을 본 자가 살았듯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행위에 관한 심판이나 재판이 아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 마치 한도견본과 같이 딱 보여주심으로 그것을 보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고 믿는 이는 심판을 받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준은 너무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이도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그 앞에서 적어도 한번은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영원히 금메달인 사람이 없고, 부자 순위에서 영원히 일등인 사람이 없으며, 노벨상을 계속 수상하는 이도 없다. 세상은 언제나 같은 기준에서 더 강하고 더 이긴 자가 항상 나온다. 그것은 그 이긴 자 외에는 그 다툼의 기준에서 죄인이요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패배는 곧 종이 되는 것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패한 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이다. 군사력이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들은 그렇지 못한 나라의 백성을 노예로 삼고, 여자를 마음대로 취했고, 아이들은 죽이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도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이긴 자는 그렇지 못하고 패한 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가치기준으로 이긴 자가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분야에서 이긴 자는 또 다른 분야에서는 패한 자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이 세상이다.


바로 그렇게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가 되려해 보았지만 결국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것에서 이긴 자가 되라고 만들어진 존재라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이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한다. 그것이 지금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세상의 가치기준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긴 자로 여기는 부자가 되려하고, 세상이 이긴 자로 여기는 박사가 되려하고, 세상이 이긴 자로 여기는 권력을 가진 이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런 자리에 이르렀을 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도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될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기준에 적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구원과 심판은 예수님으로 보이신 정체성이 기준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이루어내고, 어떤 행함이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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