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와 나누신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난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유대 관원에 대한 말씀만이 아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인지, 하나님을 믿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느냐고 물은 것은 거듭남이라는 것을 보는 안목이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난 이들이 본다는 말을 듣고서 몸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하셨고, 이 성령의 역사하심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 곧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스라엘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일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땅의 일을 말해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자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급격한 대화 주제의 전환이다. 어떤 의미일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듯이 내려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시작부분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성령의 일이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거듭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런 법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늘 바란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니고데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육신의 일로 보았다. 마치 니고데모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육신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거듭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육신으로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육신으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달력으로 특정된 어떤 날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바로 니고데모가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말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다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증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은 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게 하심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뜻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했다. 이 말씀 하나님의 의와 계획과 뜻이다. 그것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니면 하늘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사람의 육신, 사람의 삶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심령의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이라는 것이 육신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뱀과 같이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뱀과 같이 들리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 영생을 얻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의 본질이 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육신의 연약함을 행위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자주 언급하지만 초자연적인, 초인적인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어떻게 보면 육신을 가진 이 인생,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에 대한 안목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이 육신을 보니 연약하고 추해서 이것을 어떤 법으로 정한 것을 지켜내면 그 연약함과 추함이 면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안목이 사람을 수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수고함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안목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보면서 ‘저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깨닫는 것, ‘내가 저주하던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삶이었구나!’라고 깨닫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뱀과 같이 들리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이 육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몸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와 목적을 십자가를 보는 이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2,000년이 넘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읽었지만 이것을 깨닫는 이가 적은 것은 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으로 보지 못하고 니고데모가 본 것과 같이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온 것도 그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류의 모든 생각은 다 거듭남이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듭남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 다들 웃으면서 정작 신앙은 그것과 같은 안목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연코 성령의 역사하심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생도 모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땅이라 할 수 있는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이루어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직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자신의 삶인 사람들만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그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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