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겠는가?’ 하는 것도 그렇지만 거듭남이라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인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도 예수님이 돌아기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자연현상인 바람으로 비유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 3:8)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께 물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찌하여 모르느냐?’며 반문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이요 삶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듯이 성령의 세계 역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 성령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거듭난 사람에게 한정된 세계이다. 말이 한정되었다고 사람의 육신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래야하지만 그 사람의 의무대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바로 성령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방언을 하거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이 표현되는 아주 작은 일부의 일이다. 성령의 본업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본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잉태케 하는 것, 그것이다. 즉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의 뜻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아주 중요한 차이다.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바뀌고 생명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가 바뀐다는 것은 의가 바뀌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하나님의 법과 가치관으로 바뀌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고,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 온 자라,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면 이전에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모태 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며 물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다가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살다가 그 목적대로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보통사람이 하지 못하는 방언을 하게 하는 것이나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주 업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육신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세계에서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성령의 기적과 은사가 있는 것이지, 성령의 기적과 은사가 성령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종 은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내가 더 큰 것을 보이리라.”하고서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정체성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가장 큰 사랑이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다는 것, 그것을 알게 하심으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은 온갖 은사와 기적도 결국은 다 사랑, 즉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보다는 다 작다는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 은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의 거듭남도 그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온갖 기적을 보이시다가 최종적으로 십자가를 지실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셨다. 어떻게 보면 그 때가 가장 기적이 필요한 때였는데 보이신 것이라고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하늘로서 온 사람이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성령의 거듭남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또 많은 신비주의적인 신앙 가치관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기 때문에 거듭남이라는 것을 모태에 사람이 들어갔다가 오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모태에 어떻게 다시 들어가느냐고 물은 것을 어리석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병고치고 방언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 중에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서, “아! 저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구나!”라고 깨달을 때, 그 때 그 사람에게 임하심으로 “이때까지 내가 연약하다고 여기고 감추고 싶어 했던 저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존재의 정체성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잉태되어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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