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고 하니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면 그가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하신다. 즉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면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물 위를 걸어 다니고 해야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은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스스로나 사회적인 시각이 적어도 그 상태에 있는 이들, 그 상황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만 그리스도인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 그 자체가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소를 각 뜨듯이 죽여서 불 태워 제물로 드리라는 무식하고 끔찍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은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죽여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는 것이 바쳐지는 것이다.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존경하는 장수에게 칼을 바치는 것은 칼이 그 장수가 원하는 대로 사용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그 장수 앞에서 칼을 부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린다고 하니,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망가트리면서 교회에만 빠져있고, 교회에서만 살고, 세상의 방법대로 시험 쳐서 목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그것은 남편도 없고, 언제나 물을 길으러 가야하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즉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있으면 운명처럼, 본성으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에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 본성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제사요,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짐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제사 제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상을 엎으시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영과 진리로 에배드리는 분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모습을 궁금해 하지 않고, 예수님의 행동은 무조건 특혜를 주듯이 인정한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라신 의도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이해가 되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될 때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된다.’는 그것이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을 우리는 몰랐고, 예수님은 아셨다는 것 그것 하나다. 그런데 그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고, 그래서 비밀이고, 그래서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이 밥 주시고 돈 주시니 은혜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고 하셨다. 즉 너희가 그리스도가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가성 여인은 메시아라 하는 이가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그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이제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진정한 예배의 산 제물이 되는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좀 황당할 수 있다. 비록 자신에게 남편이 여럿 있었다는 것을 용케 아는 선지자로는 인정이 되었지만,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는 자기 살던 마을로 가서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요 그리스도라는 것이 인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놀라운 것이 있다. 수가성 여인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하여 물을 길러 간 우물에서 만난 한 낯선 남자, 그것도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유대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났는데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목마른 여자였다. 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목마름을 해갈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이 많은 남편을 맞이했었다. 즉 자신의 삶의 의미를 주는 남자, 곧 의를 만났다는 것이다. 마치 돈에서 인생의 목적을, 명예에서 삶의 성공을 찾는 사람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씀 앞에서 그 여인은 이때까지 자신의 남편들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랬더니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세계가 그에게 열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것들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인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계가 인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그 자체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존재로서 지어졌다는 것이 인정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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