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7-27) 나사렛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14. 13:02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가지신 육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칭>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왕은 가이사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그들을 다스리는 왕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그 안에서 세상이 가진 가치 기준에 의하여 누가 더 의롭게 되는지를 의로 가진 왕이 자신들의 왕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그 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이는 명패에 ‘자칭’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런 자신의 결단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더욱이 예수님의 명패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어로 기록했다. 그것은 그 당시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언어로 썼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유대인의 왕,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사람의 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가 유대인의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것이다. 나사렛은 당시 천한 사람들의 대명사였다. 천한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죄인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조롱 받는 이들의 고향이요 거주하는 땅이 나사렛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철저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의 땅이고 그런 사람들의 대명사가 바로 나사렛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의인이고 고상하며 거룩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정체성은 죄인 중의 죄인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괴리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해서도 의인이라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관, 애굽의 가치관, 육신의 공로와 소유로 의인과 죄인이 결정되는 가치관으로는 철저하게 죄인이신 분이다. 그 죄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예수님의 이미지와 같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의인이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의인이 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이 의인이라면 왜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 세상에서 옳다 여기는 대로 군대를 불러 빌라도를 물리치고, 그 때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내려오시면 되는데. 그게 세상에서 성공이고 의로움인데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면 왜 십자가에서 죽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는 절대로 의인이 아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 나사렛 예수를 믿노라 한다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그것으로 먹고 살고 있는 지경이니 오늘날의 교회가 바라바를 선택하고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더한 지경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다. 같은 분이고 같은 정체성을 가졌는데 그게 분리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그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육신의 문제 해결은커녕 오히려 육신이 속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면 누구나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철저하게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신분도 보잘 것 없고, 행동도 보잘 것 없으며, 그 생각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가벗겨졌고, 손과 발에 못 박혔고, 머리에 가시관 쓰신 것이다. 세상에서는 신분이 제사장이거나 왕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하고, 왕이 될 수 있는데 고작 목수의 아들로 나서 하는 행실이라고는 율법을 어기고 다니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세상의 가치관은 가차 없이 죄인으로 규정하고 처형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모습이 바로 모든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늘 죄인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의인이 되려고 사회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이르려하고, 더 고상해지려고 하는 삶을 산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 이유인 것이다.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은 사람 본연의 정체성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인생을 드려서 수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는 사회적으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나도 남들처럼~’이다. ‘나도 남들처럼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의로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누가 너에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잘 사는 것이 너의 의로움이라고 가르쳤느냐?”고. 누가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가르쳤다. 하나님만 의로우신데 자기가 의로움에 대한 기준을 가졌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자신의 벗은 모습,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감추어 의롭게 되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며 그리스도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정의내리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아니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죄인 삼아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달렸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는 것,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즉 나사렛 예수이기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듯, 오늘 우리도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늘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다. 이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의인이 되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도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 그것이 자기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본 마음 안에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되는 일이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구원? 어림도 없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유일한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이름, 곧 우리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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