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그때 밑에는 요한사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엠마오로 가던 제자)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라고 말씀을 하셨다. 자기 모친을 보고서 죽어가는 마당에 “여자여”라니. 상식적인 표현은 아니다.


이 말씀은 다소 알레고리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한정되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여자는 육신으로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모든 인생을 향하신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은 여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랑되시는 주님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잉태하여 내는 거듭난 존재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인데, 그 정체성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또 여자의 삶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남존여비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면 성경을 글자대로 읽은 외식하는 사람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한 사람에게 특정하게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우리 모든 인류를 향하신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역시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여성의 격을 가진 인생이 낳아야 하는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아 내가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낳아야 하는, 사람의 생명이 거듭나야 하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모든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새 생명을 자기 안에서 낳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볼 때는 사형수와 같은 죄인인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한다. 아니 교회에 다니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마음만 먹고 신념을 가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그 생명의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거위 아버지에 펜더 곰 아들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된 예수님을 아들이라 칭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가지신 뜻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연상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셨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연상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함을 모친 마리아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받아 주시는 존재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시인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가서 육신이 세상을 살 동안 필요로 하는 것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들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지금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대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의인이 되는 사람을 아들로 삼으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본질이 아니고,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뜻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인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필요하면 먹고 마시게 하실 것이고, 그 일에 대한 수고가 끝나면 하나님의 의(義)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 되는 유일한 법이고 의다.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면서 모든 인생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아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심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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