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7-22) 유대인의 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13. 13:4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언도 받았다. 빌라도가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패, 곧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붙이는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지시를 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자고 하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잘라 말하고 거절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있어 절대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 사건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이 세상의 삶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이 존재로서 존재했다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창세전부터 영원에 이르는 일이다. 십자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냐 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로서의 시작과 끝이고 영원한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뱀파이어를 물리치는 부적과 같이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액운을 방지하는 상징이고, 어떤 이는 자기가 삶으로 살면서 지었고 또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대속이자 미래의 보험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당연한 일이거나 자신과 무관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있어 각자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가 가진 삶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대하여 대표로서 그것을 보이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표로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인 것이다.(벌을 대신 받는다는 식의 초등적인 교리를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십자가는 인생의 운명이다. 인생의 틀(Mold)이다.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의 대속인 것이다. 이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보이시는 것이다. 사람의 정체성을 그렇게까지 보이셨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높이 달리셔서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대속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으로 죄를 범하고 벌을 예수님께서 받았다는 식의 대속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보 천치들의 이야기다. 그런 개념으로 십자가를 보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어떻게 대속하느냐?”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되고 또 그 질문에 “그것이 십자가”라고 답하는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한 어리석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죄의 본질이 행동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사람 안에 있는 의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행동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을 볼 때 그 행위 자체만 보는 것이다. 즉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죄는 사람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죄가 사람 안에 하나님과 다른 의가 있어서 그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정체성을 보이신 사건인데,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의 대속하여 벌을 대신 받으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행위만 보았지 예수님의 정체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외모를 보니 왕으로 삼기에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에도 터무니없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판단된 것이다. 그들의 모든 가치 기준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안목을 가졌기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셨기에 명패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유대인들의 요구한 것처럼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이다.


유대인, 곧 유다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통치이념인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의 최소한이자 기본적인 시작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동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존재에서 비롯된 행위와 소유를 하나님의 본질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는 신앙과 믿음과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무리 훌륭해도 의미 없고, 자기 목숨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친다고 뛰어 들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이는 죽을 때까지 뇌까려도 좋은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행위에 대한 언급은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보이는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다.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해서 항상 기도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기도인 사람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기도고 찬양이며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인데 성경에 나오는 무슨 행동인들 지키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지 못하며, 자기 행동을 아직도 다스려야 할 부분이 많기에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은 가상하나 길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위 규범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면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 믿음이 아니면 애쓰는 것은 가상하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존재의 하나님께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그러니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노력’하라는 말을 그만하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 되려 노력하나 적 있는가?


그렇게 사람의 행위를 사람의 본질로 보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행위로 왕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에서 세운 공이나 식량 문제를 해결해서 왕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나라다.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의이기에 그것이 다스리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살다가 좋지 않은 일 생기면 하나님께 뭐 잘못했나? 분석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 같은 종족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인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만 그 안목에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것 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정체성)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은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 유대인의 왕이 나와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국적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가 되어 그 의로 인하여 삶의 모든 행위가 나오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