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는 예수님께 죄를 찾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비록 반역에 해당하는 말을 하시긴 했지만 빌라도가 볼 때는 그 꼴로는 왕은 고사하고 동장도 힘들다고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린 배신자였다.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에 유대인들은 ‘이제 우리가 로마의 속국을 벗어나고, 또 가난도 벗고 많은 사회 문제도 해결되겠구나!’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해방의 상징인 유월절에 그들의 심장인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며 한껏 찬양했건만 왕은 고사하고 스스로 십자가를 진다고 하고 제자가 팔아버린 초라한 꼴로 잡혀 있는 예수님은 진정 배신의 아이콘이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에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인식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목적을 본 것이 아니라 현상을 본질로 보았다. 그들이 율법을 지켜 의로워진다고 생각한 것과 같이.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이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여겼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으로 오신 것이라 믿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아래까지 이어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을 하신 이후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같은 단서가 붙어 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리고는 돌로 쩍을 만들라고 했고,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 했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이 본질인지도 시험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지금, 한편으로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을 비난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그때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 입을 것에 속한 세상에서의 재물과 경제적인 문제, 시험이나 결혼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구하고 기도하며 그런 육신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서 찾고 있다. 2,00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이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면 속이 바뀌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 늘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신앙이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신앙이다.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나 도적이 아니라 열심당원의 지도자로서 폭동을 도모했거나 일으킨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신자로 여긴 것과는 반대로 바라바라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할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바라바를 원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선택이 그랬듯,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해결을 의지할 메시아로 믿는 것은 바라바를 선택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 아니 어느 민족이라도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속국으로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고, 그 꿈을 이루어줄 구원자,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런 기대를 가지게 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보게 한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을 보면서 ‘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바라 본 것이다. 오늘 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내용처럼.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착각이고 유대인들의 가치관이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맘대로 육신의 문제나 해결하는 신으로 망령되이 일컬은 것이다. 마치 공산국가들도 나라 이름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면 민주주의를 붙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그 말씀과 의를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신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가진 기대, 자기가 스스로 예수님께서 정치적 독립과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정의한 예수님을 정의 내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힘없이 끌려가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죽어가고 있으니 그 마음이 사기 당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는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와 같다.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사는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어놓고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에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소리치며 바라바를 선택했던 것이다. 육신으로 민중해발 운동을 하는 것이 자기들의 생각과 기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유대인들의 선택은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간택되고 있다. 그렇게 비난하는 바라바를 늘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교회를 찾았다가도 결국은 인생은 먹고 사는 문제가 잘 풀려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인생의 풍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그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인생의 먹을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 표현할 분량이 크면 삶이 풍요해질 수 있는 것이지, 가난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늘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는 증거는 아주 간단한 곳에 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지를 보면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육신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존재로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나,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나 마음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는 것, 마시는 것, 또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런 모든 문제의 근원에 대한 답 곧 빛을 비추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바로 왜 사는지 모르는 어두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두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두움을 밝히시려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바라바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 같은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 모든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인생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의미를 알게 하시고 왜 사는지도 모르는 흑암에 비취신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서 돈 주세요 밥 주세요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기도다. 하나님이란 창고지기에게 잘 보여서 자기 필요한 것 얻어가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신앙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다. 믿음이란 관계가 성립되어 시작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라바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또 지금 왜 사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육신의 문제 해결에 매몰된 안목을 물리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