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 가셔서 심문을 받으셨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은밀하게 말하지 않고 늘 드러내어 말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묻느냐?”고 하시면서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대제사장의 하속 하나가 예수님을 치면서 “대제사장에게 무슨 싸가지 없는 말이냐?”고 말을 했다.(의미가 그렇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 하속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증거를 대지 왜 때리느냐?”고 답하시니 대제사장 안나스가 또 다른 대제사장이자 사위인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결박하여 보내고 또 빌라도에 보내어져서 심문이 이어진다. 당시는 지금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종교와 정치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여서 종교적인 문제로 사람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고,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사실 예수님을 잡아오긴 했지만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죽일 명분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괘씸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가운데 실수를 하면 그것으로 송사를 할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성공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과 같은 말을 했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법이라는 것이다.(요 19:7)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괜히 죽고자 하심도 아니고, 대제사장의 농간에 넘어 간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을 줄 아시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씀하셨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에 대하여 흔히 “우리를 대신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가 더 옳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예외 없이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법에 의해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는 사람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대속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죄인,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의 대속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기에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죄를 시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죄목이 먼저 신성모독인 것이다. 감히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의 정체성을 설명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기에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이 나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얻었으니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형상으로 즉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시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많은 아니 대부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송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그런 신이 따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고상해지고 영광을 받아서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언제나 죄인인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자리를 떠나 고상해지거나 성공하면 의인이 되지만 사람이 자기 본성을 그대로 인정하면 언제나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목수의 아들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부끄럽고 금욕적인 생활로 다스려야 할 존재였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뿐더러 보기에 심히 좋은 존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을 사람이라는 형상을 가진 존재가 표현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인 것이다. 아버지의 의와 뜻을 육신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기준,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보기에 좋은 존재가 아니라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한 아담은 무화나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다.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다. 즉 율법으로 자신을 가렸다는 것이다.


그 율법, 사람을 부끄럽게 보는 선악의 기준을 가진 안목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부끄럽고 가려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자고 심문하는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이 가진 가치기준, 즉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진 세상의 안목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자신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하며 세상의 군사들을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 여긴다. ‘아니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해지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리, 죄인 중의 죄인인 사형수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신 분이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이 고상해지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말하고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심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늘 있는 심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물을 때 뭐라고 답할 것인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물을 때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예수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때 마음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대답으로 인하여 삶이 송두리 달라진다고 해도? 그럴 수 있어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다.




Written by 김홍덕 - 010.3396.5555,  the.elphi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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