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당시 독립단체라 할 수 있는 열심당의 당원이었다고 한다. 열심당원들은 칼을 가지고 다녔는데 베드로도 그 칼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그 칼을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라 버렸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귀를 도로 붙이시면서 베드로를 만류하셨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 하겠느냐(요 18:11)


마지막 잡히시는 순간까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정작 기적이 필요한 사람은 귀가 잘린 말고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칼에 잘린 귀를 온전케 하실 정도로 초인 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으러 온 자들에게 잡혀가고 있는 것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답답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예수님의 정체성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마음으로 능력 행하실 것을 참고 견디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예수님의 능력과 무관하게 지금 이 일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지금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 삼으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육지에서 싸움에 관한한 가장 강한 동물은 코끼리라고 한다. 성난 코끼리는 사자나 호랑이나 곰 아니라 어떤 동물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코끼리는 그런 어마 무시한 능력을 다른 동물과 싸워 이겨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거나 그 힘으로 자신이 먹고 사는 것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풀떼기나 뜯어 먹고 산다. 그것은 코끼리가 ‘내가 힘을 쓰면 다든 다치니까 참아야지!’ 라고 자신을 절제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코끼리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하나님 아들의 본성도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의 아들일 뿐 아니라, 천지 창조에 함께 하신 예수님이신데 이 세상의 일을 어찌 자기 맘대로 할 능력이 없겠는가? 뭐 내키지 않으면 새로 만들면 되지. 천 년이 하루 같은데, 그냥 잠시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데 그 어마 무시한 하늘의 권세는 까맣게 잊은 듯이 순순히 잡혀가시는 것은 대의를 위하여 참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근간에 속하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다. 그러니까 이 법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요원한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려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은 이렇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이르고 싶어 하는 자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르려 하는 것을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이김은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는 심각한 타락과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앙 없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지적질하는 소위 말해서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의 행태로 나타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도전하는 그 힘과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겨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이 신앙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문제시 삼으면 좀 심하게 말해서 ‘사탄의 공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기려 한다. 교회 세습을 비판하면 어리석다 하고, 추문에 휩싸인 목사를 향한 여론은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또 주일 날 장사하던 사람이 망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하고, 교회에 간다고 회사 일에 빠진다고 했을 때 욕하면 사탄의 계략이라고 한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모두 말고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와 같은 행동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일을 수습하시면서 “내가(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는 것은 베드로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열거한 현재 신앙인들이 보이고 있는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잔을 마시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스스로 착각하는 자신들은 세상으로 인하여 괴롭힘을 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잔을 마시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걷어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소위 신앙인들에게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때로는 교회가 가는 방향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없다고 책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할 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왜 있는가? 말로 사람을 책망해서 될 것이라면 예수님도 성경책을 세상에 던져 주면 되지 뭣하러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겠는가? 이런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켜져야 하고, 신앙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지키려 했던 베드로처럼.


하지만 신앙이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 풍성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절대로 죽으면 안 될 분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을 떠난 세상이 가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사형을 당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 하나님의 법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죄인 삼으려는 시도 앞에서 하늘의 천군을 불러서 물리치시겠는가? 그 안에 있는 본성이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장면은 절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본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존재며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세상의 법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죄인 되는 것이 본성인 생명,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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