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24-26) 아버지의 이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 09: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하시는 기도의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음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있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없는 과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만 봐도 적어도 예수님 당시 이전 4,000년 정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것은 모세 시대부터라고 쳐도 아담의 아들 아벨이 죽은 뒤에 다시 얻은 셋을 낳았을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고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했다고 하셨을까? 이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은 불렀지만 그 정체성은 몰랐던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버지는 물론 아들의 정체성까지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주로 범죄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신원미상’이라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을 발견되어 수사를 해야 하는데 그 피해자의 신원, 곧 정체성을 모를 때 ‘신원미상’이라고 이름을 부여한다. 마치 그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주관하는 신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라고, 또 모세를 통해서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은 알고 불렀는데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정체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범죄 피해자에게 원래 이름이 있는데 신원미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알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한한 일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그 세계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일을 다 이루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보고하듯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은 무엇인가? 예수님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 이전에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렀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 그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뜻이 표현된 존재다. 아버지 안에 있던 눈에 보이지 않고, 형상을 가지 않은 뜻이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서 표현된 존재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형상을 사람으로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사람으로 나타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 사람을 지으신 의와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자신은 하나님의 어떤 의가 자기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인지를 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로 알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아는 것이며, 세상과 다르게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신 것은 물 위를 걸으시는 일로도 아니고, 오병이어의 사건도 아니며, 죽은 자를 살리신 일로 인함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신 사건은 오직 십자가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실패자로서 사형수가 되어 못 박히시니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 세상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안목은 하나님의 관심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안목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진 이들과 신앙은 세상에 넘쳐난다. 산신령에게 비는 것이나 부처에게 비는 것이나 심지어 돈을 믿는 것이나 자기 힘을 믿는 것이나 모두 예외 없이 그것이 목적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자기가 믿는 것의 위대함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는 무례한 신앙이 바로 세상에서 잘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시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밑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한 사람들과 같은 시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세상의 법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과도 같은 신앙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시각과 같은 것이다.


그런 가치관과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 정체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로 아는 것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를 알게 하신 십자가와 반대로 향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법으로 실패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는데, 많은 사람들(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무리 입으로 불러도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알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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