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24-26) 아버지의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3. 12: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고 하셨다. 이는 여호와라는 이름, 단어가 이 땅에 알려졌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와 동일하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다는 의미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넘쳐나지만, 사랑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남자, 또 여자가 있지만 그 중의 한명과 결혼해서 사는 것은 여자와 결혼하고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 나에게 여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사람 또 나에게 남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사랑은 상대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 상대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헤어지면 삶의 의미가 없다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에게 존재의 의미고, 또 그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 사람들이 어떤 물건이나 일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씻고 빨고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의 존재 이유, 삶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이것을 짧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사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람에게 끊임없이 알게 하시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또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정체성은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정체성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다. 아들은 자기를 알아야 아버지를 안다. 즉 아버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며 그 관계성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 즉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정립이 되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해질 때 그 사이에 사랑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인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신 분이라는 의미와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또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예수님의 육신으로 표현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다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비추어 생각한다. 육신의 일을 헌신적으로 돕고 수고하는 것과 같은 것을 사랑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그런 모든 사랑의 표현은 사랑에 대한 의미가 표현된 것이지 그것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 자신의 삶에 있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 헌신적인 것이지, 관심이 없는 일은 전쟁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사람이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또한 사람이 알았다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정체성이며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의미 있는 관계, 곧 사랑하는 관계이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예수님으로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아버지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다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든 인생에게 중요하고도 중요한 이유는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도 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심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존재로 지음 받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펜더 곰의 아버지가 거위가 될 수 없다고 했듯, 세상을 살 동안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믿기에 하나님이나 또 다른 신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문제 해결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이 그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나타나게 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존재에 맞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 의이신 분이지, 나타난 것을 보고 그렇게 하면 내면이 바뀌는 법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가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살고 있는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 받기 원하고, 또 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때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고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삶의 목적, 즉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그 본질로 착각한 세상에서 인정하는 법대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도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세상이다. 세상의 법을 자기 삶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교회에 다닌다고, 눈만 뜨면 성경을 보고 외우듯 한다고, 육신의 삶을 팽개치고 교회 일만 돌본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관한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어떤 세계에서나 항상 나보다 이긴 자가 있어 나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의 법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아는 자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자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것이고,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세상을 오래 살면서 세상이 원하는 법을 좇아서 나이 들도록 살고 나서 보니 그 법으로 그렇게 이기려 애쓴 자기 삶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도전하는 중이고, 나보다 더 이긴 자는 세상에 충만한 것을 보면서 자기 삶이 허무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모른다고 하고, 늙어서 인생의 의미를 ‘무(無)’라 하고 인생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기에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순종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체성을 아는 것 또한 당연하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이 기도의 주제다.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며, 하나님이 아버지시며, 하나님을 알고, 이름을 알리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 하나님의 이름과 정체성을 알고, 자기 존재의 의미가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이 안에 있는 인생이 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에 그 목적을 이루시려 십자가로 가시면서 하나님께 창세전부터 가졌던 그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구하시는 것, 그것이 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자기 삶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하나님이 자기 삶의 의미와 내용이 되시고 자신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나타내므로 사람들이 그 삶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그 목적이 우리 삶의 의미다. 그 의미가 깨달아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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