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24-26) 아버지를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 07:00 Writer : 김홍덕

영화 쿵푸펜더에서 펜더 곰의 아버지는 거위로 나온다. 그건 만화이기도 하고 또 그 만화 역시 3편에서 결국 펜더는 펜더 아버지를 만난다. 즉 아버지는 결국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알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아는 자신의 정체성, 그 안에서 결국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세상은 세상이 가진 어떤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 가치관, 그 안목과 정체성 안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의 자식들(요 17:12)’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은 결국 멸망이라는 것 안에 갇혀서 살기 때문에 그들의 아버지 역시 멸망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가진 가치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아버지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에게 ‘너는 누구냐?’를 물으시는데, 사람들(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은 하나님을 찾아 갈 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드릴지를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공로와 소유를 교회에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자기는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로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으로 믿으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그 신은 자기의 우상이요 자기 하나님일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응답하시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더니 사업이 잘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하나님을 믿는 세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닌 것이다. 길 가다가 다른 인종의 사람이 다른 언어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응답하는가? 그렇지 않듯, 존재의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누구라 하는 지에 응답하시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것에 반응하시는 분이시지,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답을 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성공은 되면 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자기 하나님, 자기 우상을 더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도 하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터부시하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이 다른 정체성을 가졌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펜더 곰 아들에 거위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만화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펜더도 거위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자신을 볼 때 스스로가 봐도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시 자신을 보니 하나님은 참 존재의 신이심이 우러나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육신으로 살 동안 필요한 것들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려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공로와 소유의 신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어디 하나님 앞에 자기 가진 십분의 일을 드려서 뻥튀기 하듯 자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잡신으로 섬긴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의 정체성이 바로 풍요와 다산 아닌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신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신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누구라도 아버지를 알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아버지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과 정체성이 같은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니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아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셨기에 세상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아셨던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법 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 정체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그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이라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 땅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십자가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내려오셔서 그야말로 세상의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 가치관 안에서 이긴 자가 되어 영광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럴 능력이 없는 것 또한 아님에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던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은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체성도, 자기 정체성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단순히 부르고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의 정체성과 자기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관계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것은 길가다 아무나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같은 정체성, 같은 세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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