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체성이 정립이 되면 그 정체성에 맞는 자리가 생긴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신다고 하셨듯이. 존재는 항상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자리가 있다. 부엌칼은 언제나 부엌에 자기 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떠나 있으면 주인은 항상 그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곳이 자기 정체성으로 인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같이 그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같아지기를 기도하셨다. 즉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과 의와 뜻을 나타내는 존재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으로,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당연히 아들에게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논리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사람들이 복권을 사고선 그것이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며 즐거워한다. 복권을 샀다는 것만으로 당첨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이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 부르는 것은 같은 것이다. 복권은 자기가 가진 번호와 추첨번호가 일치할 때(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때) 복권이지 그렇지 않으면 휴지 조각에 불과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자신의 정체성이 동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는 믿음이 소유와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믿음이라면 그것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린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회 청소하고, 성경 읽으면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복을 주시고, 또 죽어서도 세상의 개념과 같이 부자로 안식하며 살게 한다는 식의 믿음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남자에게 비키니를 주는 것이 모독이듯이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림이 어찌 모독이 아니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기적으로 왕이 되는 것도, 부자가 되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또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하지만 이 육신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심히 좋은 존재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같은 존재니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죄인의 틀에 매달려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모습이 바로 자기 모습이라고 깨닫는 사람도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존재,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다. 부엌칼이 부엌에 놓이게 되는 것과 같이. 그것이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식이다. 어떤 것이든 자기 존재 정체성의 자리에 있어 그 존재 정체성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안정된 것이고 안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회복이며 그 상태가 바로 안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이 거하시는 자리에 거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 가려해도 주인이 늘 그 자리에 둔다. 부엌칼이 다른 곳에 있으면 주인이 언제나 부엌으로 가져다 놓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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