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예수님의 제자들만을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가 제자들만을 위함이 아니라 제자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함이라고 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19)


이 예수님의 기도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단계적)조건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 =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한다고 하셨고,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 역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듯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므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 됨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삶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이 일하시니 자신도 일하는 삶이 되고, 그 삶의 어느 작은 한 부분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내용이고, 삶으로 표현되는 속사람의 전부인데 어떻게 그 육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은 숨 쉬는 동안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떨 끝 하나까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두 종류 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이란 언제나 Be or Not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면 그 생명이지 반은 고양이고 반은 강아지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삶의 어느 순간 또 어떤 부분도 그리스도여야지 그리스도 났는데 어떤 부분은 그리스도답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와 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로서 그 삶의 어느 순간도, 어떤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적이 없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역시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께 구하셨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어떤 분이 온전치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어떤 순간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생명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다 사람이었는데 이 순간이 되기 전 어떤 순간에 개였던 적이 있었는가? 그럴 리가 없다. 개 같은 짓은 했을 수 있지만 그 육신이 개의 유전자로 치환되어 개와 같이 산 적이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생명일진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어떤 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함을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의아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행동이나 소유의 드림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가끔씩 교인들에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험한 일이 생기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욥의 세 친구와 같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니 저런 거야?’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면, 또 그렇게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을 깨어 있는 것이라 위로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행동에 대하여 자신이 없으므로 어떤 순간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했다고 회개한답시며 울고불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하거나 신실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는 선악과 먹은 아담의 안목으로 자기 삶을 보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아니 알아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기도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 된다면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살아 숨 쉬는 어떤 순간, 어떤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 수밖에 없음을 부인하거나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하나이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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