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하신다. 그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은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셨다. 즉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상에 있는데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구약의 율법에서 사람이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중에 물고기에 대한 규례가 있다. 이 규례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오징어를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바다(큰 물 – 세상)에 있는 고기에게 비늘은 바다와 자신의 몸 사이에 경계가 있고 구분이 된다는 것이고, 지느러미는 삶에 방향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이 된 존재(거룩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개인 신상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록하는 것이 세상과 구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이건 쉽게 동의하겠지만,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은 구분되지 않은 것이라면 아마 양심이 있다면 힘든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모든 삶이 세상의 일반적인 삶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나 그 삶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도 육신을 가진 사람이 가진 모든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욕심도 있고, 분냄도 있고, 성욕도 있고, 짜증도 내고, 공부도 하고, 밥벌이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거룩함과 구분됨에 대하여 식욕도 절제하고, 성욕도 절제하고, 화도 참는 절제와 금욕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세상과 분리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 해야 구분에 이르는지 정확한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어떤 수준으로 유지하여야 합격이라는 것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Be or Not이라는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으로 보면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줄인다고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쨌든 1%는 있는 것이나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금욕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그 논리 안에서도 망한 자가 되는 것이다.(이것이 율법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거룩함이란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추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절제하고 억누르는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삶은 세상과 구분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도 모르면서 자기 맘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겨 금욕하고, 또 사람과 세상에 대하여 자기 맘대로 정의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모습일 뿐인 것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모든 삶의 모습과 육신의 본성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일하지만 그 육신에 대한 안목, 그 육신을 보는 관점, 그 육신이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지 모르면 세상에서 거룩한 삶에 대하여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모르는 것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대상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졌기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살지만 육신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이 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누구나 드러내지 않았지 다 가진 본성이고, 또 누구하나 예외 없이 자기가 그것을 선택해서 가진 자가 없다. 만약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지금 사는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 육신의 기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 배설이나 배고픔이나 고통과 같은 것을 선택하겠는가? 그런 것은 모두 자기 의사와 무관하지만 사람이 가진 본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의 모습과 본성을 사람이 부정하게 여겨서 금욕적인 삶을 살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고상하게 구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부정하게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 하나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위로서의 범죄가 파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부정하게 보는 중에서 비늘 가진 물고기와 같이 구분이 되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다면 이는 어떤 일을 위하여 아주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 온전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유일한 의와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이 사람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형식이라는 것을 믿고 알며,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겠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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