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바라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요한복음 17장을 시작할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언급을 했었는데 그 요지는 눈에 보이는 것은 본질로 알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역시 현상계적인 하나, 즉 두 개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나 동일한 능력으로 복사가 되는 것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알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영이 사람이라는 육신 안에서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신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을 신성하게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기보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모습 그대로가 어떤 모습인지를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 계획, 뜻)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지으신 목적이 육신으로 나타나신바 된 분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원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시는 것은 적선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무이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과 뜻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순교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목숨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사용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 지으신 목적인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려 하다 보면 순교도 있고, 가늘고 길게 사는 인생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하여 기도하실 때에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름이라는 것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 그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다. 그러면 여호와라는 이름이 하나님과 사람을 붙이는 접착제와 같은 것이라는 말일까? 그것이 아니다. 이름은 곧 그 존재의 정체성이다. 즉 하나님의 정체성으로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신, 사람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름이나 개념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의 신이다.


사람들이 신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람이 가진 것 이상을 가진 존재나,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돈이 없으면 신께 빌고, 자기 능력으로 안 될 것 같으면 신께 비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도 그런다는 것이 문제긴 하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지어놓고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데…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신 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어떤 물질이나 공로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범죄(행동)한 아담에게 가서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사람들이(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은 존재가 온전하면 그 존재로서 그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온전하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개를 사람처럼 천 없는 노력으로 훈련시키는 것 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더 사람인 것은 존재가 사람으로 온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만 정확하게 안다면 어떤 행동, 어떤 소유라도 다 자기의 것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신에 대한 개념이 하나의 예외 없이 모두 행위와 소유에 관한 신인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존재의 신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이다. 즉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분됨, 이 이름의 거룩함이 사람에게 있어 자기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 순종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존재로서 서로에게 의미가 있느냐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서로의 관계에 있어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만 정해지면 그에 맞는 행동하기 마련이다. 남자는 한 여자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여자가 되면 그 여자를 위하여 남에게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증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존재의 정체성과 의미만 정해지면 무엇을 드리고 줄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다 정해지고 또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하나님께 가서 “제가 하나님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같이 바보 같은 소리를 기도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의 관계만 정립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또 사람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인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만 알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고, 사람에게 행위나 소유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관계를 형성하시려는 분이라는 것, 그것만 알면 신앙은 완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성경의 모든 것이 자기 삶에 이루어진 것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킨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 예수님께서 택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고, 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기도하시는 것이 이 예수님의 기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니 이것이 다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먼저 십자가로 가신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고 나면 세상에 있는 택한 자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서 살게 될 것이게 이제 예수님은 정말로 아버지의 품으로 가시고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여 택한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공장에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 때, 먼저 상품에 대한 기획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의다. 그 의가 설계도로, 또 시작품(Pilot Product)로 제작되고, 그 시작품이 의도한 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인되면 양산을 한다. 마치 그와 같이 이 땅에 사람의 표준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이제 양산 곧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로 인하여 드러났으므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시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실제 제조업에서도 시작품을 시장에 팔지는 않는다.)


시작품이 승인이 되고 회사 안에서 표준으로 자리했다는 것은 많은 양산품 즉 시작품과 같은 물성을 가진 제품들이 제조된 목적대로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이 땅에 사는 육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였듯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고 예수님께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뜻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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